흰 머리카락, 테이트 모던, 그리고 잭 캐루악 같은 것들

날 유심히 봐주는 지인들의 목격에서 시작됐다. “흰 머리카락이야, 뽑아 줄까?” 그 다음엔 공용화장실의 밝은 조명 아래 반사된 내 모습을 보고 내 눈에도 한 두 가닥 흰 머리카락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흠, 뽑아야 하나’ 싶어 네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을 넣어 천천히 촤르르 쏟아내려 봤다. 조금 과장해서 흰 머리카락이라고 다 뽑아내다간 조만간 가발을 사야 할 지경이었다. 보그 편집장만큼 세련된 패션 감각으로 유명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흰 머리에 어울리는 경력과 나이를 갖춘 것 같은데, 난 아직 이 색깔이 수용이 되지 않았다. 나이 탓은 하기 싫고, 정말이지 2017년에 급격히 늘어난 이 흰 머리카락의 원인을 찾다보니 <씨위드>에까지 생각이 가 닿았다. 정신없이 바쁜 시간들이 내 청춘을 후딱 잡아먹은 거라는 원망을 이 녀석에게 돌려버리고 싶어진 거다.

 

정신없이 달렸다. 2016년 말부터 2017년 5월 창간호가 나오기까지 쉴 틈이 없었고, 창간호가 나오고 나서 배포와 홍보도 끝이 나질 않았다. 배포에도 홍보에도 한계란 없는 거였다. 마감을 하고 책이 딱 나오면 시원하게 끝난 느낌이 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세상에 내놓아버린 이 녀석을 언제까지 키워야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창간호만 나오면 될 것 같던 기대감을 잠식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유형의 매체에 대한 책임감은 생각보다 묵직한 것이었다. 바쁜 시간보다도, 그 무거운 책임감이 날 나이 들게 했는지도 모르고, 흰머리라는 시각적 형태로 두둥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청춘들의 날것의 문장과 터치를 담아내겠다는 야심찬 독립잡지의 편집장이 벌써 흰머리라니. 이거 참 청춘과 거리가 멀어져버린 건 아닌가 싶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나저나 쓸데없이 흰머리에 대한 이야기나 주절거리고 있는 지금 나는 테이트 모던의 새로운 건물 블라바니크의 2층 창가에 기대 앉아있다. 창가자리에 1m 가량의 길죽한 쿠션을 두고 편히 눕거나 앉을 수 있도록 해 고단한 뮤지엄고어에게 쉴 자리를 제공해 주는 곳이다. 언젠가부터 아무데서나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나는, 이곳에 앉아 한국서 공수 받은 하루키의 신간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가, 페이스북에 자잘한 포스팅도 하고, 이렇게 전격으로 에디토리얼을 가장한 잡담을 굳이 문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페이스북의 포스팅은 자잘한 안건이 아니었다. 뉴욕의 딜론앤리 갤러리와 뮌헨의 로스트위켄드라는 독립서점에 씨위드가 입고됐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이 양지바르고 편하기까지 한 자리에서 한참을 책을 읽다가 문득 이동에 대한 생각을 했다. 베니스의 팔라조 그라시 아트샵에서 사온 캔버스백, 한국에서 런던으로 오는 지인에게 굳이 건네받은 일본어에서 번역된 하루키의 한국어책, 그 책을 읽고 있는 런던 테이트의 2층 창가, 뉴욕과 뮌헨에 비치된 씨위드의 사진을 메일로 건네받아 페이스북에 포스팅하고, 방금 본 전시는 스위스 출신으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자코메티의 회고전이었다. 몇 시간 뒤 제주에선 씨위드와 제주맥주의 콜라보로 기획한 전시가 오픈한다.

 

 

 

국경도 시간도 상관없이 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지고, 그 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연결된다. 흰머리가 생기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주변에선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많은 것들을 움직인다. 흰머리나 뽑으며 허송세월하기 보단, 역시 한 번 더 정신없이 움직여야겠다는 결론을 내려본다.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는 익히 수많은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 책을 요약하는 두 문장을 꼽자면 단연 이것. “우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고귀한 행위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즉 움직이는 것, 우리는 움직였다!”

이나연

씨위드 발행인.

NAYUN LEE

Publisher of SEAW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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