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 것들_Prologue

“무슨 일 하세요?”

<씨위드>일을 하고 나서 새로운 사람들을 예전보다는 많이 만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요즘 부쩍 많이 듣게 되는 질문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항상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상대가 그런 질문을 해 오는 경우에 으레 나는 “돈 되는 일은 다 합니다.” 라는 대답으로 넘기기가 일쑤인데, 앞으로 시작될 나의 이야기는 내가 산 것들, 내가 산 고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여러 가지 의미로 다시 주목을 받지만 그것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들은 한참 전부터 내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쁘게 표현하여 고생이라고는 했지만 요즘처럼 선선한 바람이 슬렁슬렁 불어오는 늦여름 밤에는 추억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기억력이 더 감퇴되기 전에 차근차근 꺼내어 보려고 한다.

불행자랑대회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우울감에 빠뜨리려는 것도 아니다. 또한 흙수저의 자수성가 성공기도 아니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우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환점이었던 큰 사건을 언급해야 이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때는 1997년,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닥쳐왔던 그 때로 돌아가야 한다. 쓰고 보니 벌써 20년 전이라 소름이 오소소 돋을 지경이다. 물 흐르듯 흐르는 시간이란.

나는 바다를 코앞에 둔 동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꾼의 자녀로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농경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런저런 초딩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집은 꽃 농사를 지었는데,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오손도손 피는 것은 아니었고 하우스에서 대량으로 농사를 짓는, 그런 꽃밭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작물은 거베라, 국화, 소국, 후리지아, 해바라기, 아이리스 같은 것들이었고, 모든 화훼농가가 그러하듯 졸업식 시즌과 입학식 시즌이 한 해중 가장 성수기인, 소위 말하는 한철 장사였다.

부모님은 대학에서 원예를 전공하고 바로 농사에 뛰어 든 경우였기 때문에, 다들 한다는 귤 농사는 손도 안대고 오로지 꽃, 꽃 외길인생을 걸으셨다. 이게 정말 아쉬운 점 중 하나인데, 모두가 예상이 되겠지만 경기가 나락으로 떨어지자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농사 중에서도 꽃 농사가 일등이었다. 꽃값도 폭락을 하고, 극성수기인 입학졸업시즌도 소용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라에서 저리로 대출해주던 농경자금이며 연대보증제도며 모든 게 막혀버리는, 실로 부도밖에는 도리가 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물론 당장 부도가 난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 집도 밭도 다 무(無)로 돌아가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다. 이런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도 체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버지 친구 분이 우리 집 보증을 섰다가 빚 폭탄을 맞는 바람에 술을 드시고 우리 집 현관문을 깨부순 사건이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계절은 아리송하지만 고방유리로 된 샤시문 한 짝이 통으로 작살이 나는 바람에 그 사이로 들이닥쳤던 찬바람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 유리를 갈 돈이 없었던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리가 있던 자리는 두꺼운 꽃 박스와 청테이프로 보수가 되었고 나는 며칠 뒤 대강의 사정에 대해서 어머니께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나이도 30대 중반, 나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인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 그런 얘기를 꺼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 때 내가 뭘 알았겠나. 집에서 나타나는 변화들에 당황스럽고 사정을 알지 못하여 답답하고, 그러니 엄마를 닦달하고.

맏이인 나에게 어머니는 지금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해 주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때부터 나는 이렇게 다짐했던 것이다. ‘돈을 벌어야겠다.’

그 즈음하여 내가 서점에서 어머니를 졸라 샀던 책이 바로 다섯수레에서 나온 석혜원 작가님의 <용돈 좀 올려주세요>다. 실과시간에 용돈기입장에 대해서도 배웠고, 책도 읽었더니 내 돈은 내가 관리하고 싶은 욕망이 마른 나뭇가지에 불붙이듯 활활 타올랐다. 내 돈이라고는 어머니께서 일주일에 한 번 주시는 용돈 이천 원이 다였지만,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내 돈도 아니었지만 한 번 꽂힌 이상 질주해야만 하는 나는 폭주기관차였다.

그 때는 나름 고민이 많은 꼬맹이라 하느님을 열렬히 믿으며 성당을 다니고 있었는데, 시외버스타고 30분 거리를 매주 토요일마다 빠지지도 않고 열심히 다녔다. 한 달 8천원의 용돈 중 절반 조금 안 되는 돈을 성당에 가는 차비와 헌금으로 썼고, 4천원은 월간 만화잡지를 사는 데 쓰고(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았었는데), 그러고 또 남는 돈으로 농협 통장에 저금을 했다. 그리고 용돈이 하루라도 밀리는 날이면 월급이 밀린 노동자처럼 어머니를 들들 볶았던 것이다. 새삼 죄송스럽다. 불효녀는 웁니다.

여하튼 나의 고군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용돈 외의 수입을 올리려고 했던 꼬꼬마 시절부터 첫 알바를 시작할 수 있었던 중학교 3학년 때,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무엇을 좇아 달리고 있는 것인지 헛갈리지만 글을 쓰면서 기억을 더듬다보면 또 길이 생기고 뜻이 생기지 않을까. 밤이 깊었고, 나는 아침에 다시 힘을 내 출근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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