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과 심각함의 이율배반, 아댈라 리의 진지한 축제

 

 

색색이 국화꽃이 가득 놓인 화려한 색깔로 장식된 커다란 상자. 풍성한 음식. 지붕 위의 꽃 장식. 붐비는 사람들. 자줏빛 리본과 빛나는 빨간 구슬들... 이렇게 평소 보기 힘든 이미지들이 넘치는 장면 장면은 9살 소녀의 눈엔 신나는 파티 같았다. 다만 하얀 옷을 입고 울고 있는 할아버지가 낯설고, 이모가 왜 그 좋아하는 떡을 먹지 못하는지 영문을 모를 따름이다. 대강의 묘사로 눈치 챘겠지만 소녀가 관찰한 파티는 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예쁜 상자는 다름 아니라 할머니의 관이었다. 

한국의 문화에선 모두가 살만큼 살았다고 인정할만한 연로한 나이에 죽음을 맞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오래 앓아 괴롭거나, 가난해서 굶주리는 일 없이, 장성한 후손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떠난 이의 장례식을 호상(好喪)이라고 칭한다. 더불어 현세에서의 삶만큼 내세에서의 삶도 복되길 기도한다. 말이 좋아 호상이라지만, 떠나는 이에겐 편안하고 좋은 죽음일지언정 남겨진 이에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9살의 소녀에게 죽음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물론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장례라는 행사가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 때 할머니의 장례식은 알 수 없는 환상과 슬픈 감정이 뒤섞이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그렇게 깊게 새겨진 시각적 기억은 작업을 만들어내는 좋은 소재의 공급처로 숙성됐다. 

아댈라 리의 작업은 한국의 호상처럼 시각적으로 화려한 축제인 동시에 깊은 정서적 슬픔을 내포한다. 작가가 칭한 명칭은 "심각한 의식(serious ceremony)"이나 "아주 아름다운 제의(magnificent ritual)"다. 아크릴 물감이 내는 형광색과 어린아이의 표현을 닮은 자유분방한 형상들, 싸구려 파티용품이나 플라스틱이 아댈라의 작품을 구현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 발랄한 요소들이 탄생시킨 이미지들은 죽음, 윤회 등 진지한 동양사상을 탐구하는 중이다. 전술했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상당부분 빚을 지고 작업을 진행해 나가지만 작업 테크닉이 어린아이처럼 서툴지는 않다. 꾸준히 유기적으로 쌓여나가는 밀도 있는 화면이 풍부한 색상과 어울리면서 시각적인 만족감을 충분히 제공한다. 현대미술 속 만연한 "나도 그리겠네, 이 그림"같은 조소를 받는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다시 대중과 소통하기에도 무리가 없다는 뜻.  

현재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으로 떠오른 뉴욕 브루클린의 크라운 하이츠에 마련한 아댈라 리의 작업실을 찾았다.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점잖고 조용한 주택지구 속에 화려한 핑크빛의 작업들이 숨겨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형광색의 파티 공들이 모여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 조각품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물리적 시간이 체감되는 듯한 밀도 있는 드로잉도, 커다란 캔버스 작업도 한번 내려놓은 시선을 거두기까진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흥미로운 작품들이었다. 아직 젊은 작가이지만 맥락 없이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평면 화면은 안정감이 있었고, 스케일이 큰 설치작업은 에너지가 대단했다. 게다가 화사한 색감들을 보기 좋게 배치하는 감각 덕에 그림과 설치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작품을 기다리는 한 명의 겸손한 미술애호가이자 관객으로서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사람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뭘까? 패미닌한 듯 잔혹한 구석이 흥미롭고, 심각하면서도 화려한 화면이 작품을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하는 힘이다. 편집증적으로 반복되는 작은 점이나 유기적인 모양의 패턴, 거기에 더해지는 원색이나 형광색의 강렬한 색채는 쿠사마 야요이의 땡땡이 작품들과도 닮았다. 

작가의 목소리도 들어보자. "어릴 적에 개미와 놀아본 적이 있죠? 저는 개미를 관찰하고 먹이를 주고, 손가락에 올려놓고 그 발로 내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느낌을 좋아했어요. 개미들은 작고 다치기 쉬운 존재잖아요. 제가 먼저 해치지 않는 이상, 작은 개미가 저를 먼저 해칠 일도 없고요. 그런데 만약 그 작은 것들 수 백 마리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마 엄청 불쾌해 질 거예요. 수천마리는 어떻겠어요? 아마 공포겠죠. 내 작품 속에 작은 재료들이나 형상들도 작은 개미처럼 혼자서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하나의 그룹으로 모이면 위협적일 수 있죠. 편안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해주면서요." 

사회라는 안전망 안에서 편안해 하면서도, 그 사회의 감시망 안에서 다시 불편해지는 아이러니를 현대인들은 익히 알고 있다. 심약하고 유약한 인간의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부조리를 품고 있다. 죽음 앞에 불가항력인 나약한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도 낙담한지 오래다. 아댈라 리가 끄집어낸 감정은 그런 인류 보편의 불편함이었다. 미술계에선 '언캐니'라는 표현으로 지칭되는 유명한 감정이다. 이 부분에서 떠오르는 작가는 마이크 켈리(Mike Kelley, 1954-2012)다. 인형이나 악세서리 등의 잡동사니를 이용해 독특한 연출을 하거나 캔버스에 편집증적으로 붙여 조각도 회화도 아닌, 추상도 구상도 아닌 이상한 느낌을 끄집어냈던 작가다. 귀여운 봉제인형을 대상으로 성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하거나, 인형들을 해부학용 시체처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전시하는 등의 작품으로 역겨운 느낌이 드는 예술들을 말하는 에브젝트 아트(Abject Art)을 말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가다. 사람의 배설물이나 살코기 등 보기만 해도 구토를 일으킬 것 같은 재료들을 사용하는 에브젝트 아티스트들과 화사한 아델라의 작품에서 교차점을 찾는 게 무리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살코기로 만든 리본을 그린 평면 작업을 보면서 야요이보다는 켈리 쪽과 비교하는 것이 아댈라의 작업을 잘 이해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졌다. 아댈라의 파티용품을 켈리의 인형이나 싸구려 악세서리로 대체하면 실로 작품의 결과물이 비슷해진다.   

동양사상, 여성스러운 조형 감각, 에브젝트 아트 등으로 돌려 말했지만, 사실, 아댈라의 작업은 그저 보편성에 호소하고 있다. 이 불편한 보편성이 어떤 호소력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공감을 끌어낼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믿건대,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부지런히 화면을 꾸며내는 방식에 시선을 두는 관객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림。 아댈라 리

재미있게, 멋지게 살고 싶어 태어난 곳 부산에서 도망쳐 서울로 갔고, 서울에서 다시 뉴욕으로 옮겨왔다. 작업에 있어서도 가장 궁극적으로는 재미를 추구한다. 괜히 어렵고, 복잡하고, 그럴듯 해 보이는 걸 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쓰고 있다. 현재는 본인의 작품이 “너무 달아서 치명적인 불량식품같다” 라는 생각을 하 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adehla@gmail.com 

 

이나연

씨위드 발행인.

NAYUN LEE

Publisher of SEAW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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