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섬을 항해하는 서퍼들을 위한 조언

2년 전, 책을 한 권 출판했다. 첫 번째 저작이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예술세계에 몸 담으며 기자와 저술가로 활동해왔다. 이 책은 2015년 봄, 두 달 동안 유럽 6개국(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 있는 아트 레지던시 13곳을 경험하고 쓴 책이었다. 그간 활발한 취재를 통해 다양한 예술종사자들을 만났고,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예술 세계의 중심과 이면을 두루 경험했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단독으로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레지던시 리서치와 지원 과정부터 시작해 실제로 레지던시를 방문하여 디렉터와 입주작가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고, 각 챕터의 끝머리에는 해당 레지던시 잠재 입주 작가들을 염두에 둔 특징과 정보를 담았다. 단순히 홈페이지만 보고 정보를 옮기거나, 인터뷰만으로 레지던시를 파악하거나, 표면을 보고 실체를 추정한 글이 아니라, 실제로 유럽으로 날아가 체험하고 살아본 공간만을 책에 담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활동은 집필이었기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실험적 퍼포먼스였다는 생각조차 든다.

이 책은 한국어로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보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저자의 입장에서 제목에 극구 반대했지만, 기각됐다. 반대 이유는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아트 저널리스트로서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신념과 예술가의 정의와 명백히 어긋났기 때문이다. 일단,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예술이라는 것이 잠깐 해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포기할 수 있는 것인가? 게다가 예술가로 “한 번 살아보기”라니! 예술은 일회용이 아니다! (다행히 책이 많이 팔리진 않았다) 만약 내가 느낀 뉘앙스를 예민한 예술가들도 공감했다면 분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예술가들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예술을 통해 성공하려는 야망 있는 예술가들도 포함이다. 책을 쓰면서 만나길 기대했던 독자들은 취미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에 자신의 삶을 건 예술가들이었다. 이 글은 저술 퍼포먼스를 통해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레지던시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사소하지만 친절한 가이드이다.

예술가들이 집을 떠나 레지던시에 입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서퍼다. 위태로운 널빤지에 몸을 의존한 채, 한 쪽 발은 상상의 세계에, 다른 한 쪽 발은 현실이라는 파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놓는다. 모래 해변에서 태닝이나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다 깨나도 그 스릴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예술시장에서는 성공한 1%의 슈퍼스타가 나머지 99%의 시장을 잠식한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 창작을 위해 생계를 위한 직업을 병행한다. 창작물을 내기까지, 세간은 우리를 현실감각이 결여된 몽상가라고 비난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창작물이 발표되면, 다음부터는 수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창작물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소수이며, 그것이 대중들에게 해독되는 과정은 또 다른 터널이다. 아주 운이 좋지 않은 이상 우리의 돌림노래는 대개 이런 음울한 멜로디로 진행된다. 이 순탄치 않은 과정에서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을 포기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그런데 창작의 어두운 과정을 견디는 한 가지의 대안이 바로 아트 레지던시에 입주하는 것이다.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에게 창작 스튜디오를 제공해주고, 골치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과 자극에 노출될 수 있게 해준다. 둘 다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창작 조건이다.

열악한 창작 현실에서 탈피하기 위해 레지던시에 지원하는 작가들은 따라서 대체로 경제적으로 넉넉치않은, 그러나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확신으로 미래를 베팅하는 젊은 예술가들이다. 그렇다면 레지던시 항해를 위한 다음 단계를 위한 질문은, “어떻게 자신에게 맞는 레지던시를 찾을 것인가?” 가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인터넷 검색창에 www.resartis.org를 쳐보길 바란다. 70개국의 500개 이상의 레지던시 정보가 담겨 있으며, 펠로우십 등의 프로그램 정보도 나와 있다. 이 사이트는 단순히 정보 플랫폼이 아니라, 전세계 레지던시 디렉터들이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연결된 아트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나 역시 책을 쓰는 리서치 단계에서 이 사이트를 알게 됐고, 유럽에 있는 100여 군데의 레지던시에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20여 통의 답장을 받았다. 이것을 바탕으로 레지던시 항해를 떠났다. (이 과정 역시 책에 모두 기술되어 있다.) 사이트에서 국가와 도시(혹은 지방), 예술 장르, 입주 기간, 운영기관 (아티스트 / 미술관 혹은 갤러리 / 대학 부설 / 정부기관 등), 스튜디오 사이즈, 동반인 가능 여부, 마감 일정 등의 정보를 카테고리별로 검색할 수 있다. 이 때 예술가들이 레지던시 체류의 목적과 목표 결과물을 다시 한 번 숙고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체류 기간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는가? 창작물의 스케일에 따라 2달이면 충분할 수도 있지만, 2년도 부족할 수 있다. 창작 환경으로 시골을 선호하는가? 도시를 더 선호하는가? 도시에 머물면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와 근접하다는 것이다. 반면 조용한 환경에서 집중이 잘 되는 작가들도 많다. 그런 경우 도심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내외의 거리에 있는 레지던시에 머무는 방식으로 타협할 수 있다. 보통 도시는 높은 지대 때문에 대형 스튜디오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형 스튜디오가 필요한 장르의 작업은 유리하지 않은 수도 있다는 말이다. 특정 도시를 선호하는 성향은 다시 한 번 따져봐야 한다. 그곳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은 내가 필요할 때 정말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추구하는 예술의 전통과 트렌드가 그 도시에 있는가? 특정 도시의 명성에 기댄 낭만적인 환상만으로 장소를 선택한다면, 현지에서 교묘한 도시 슬로건과 마케팅 수법에 실망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을 홈페이지와 리서치를 통해 잘 살펴야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조건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도표로 만들어 비교하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예술가들로서는 경비를 지원해주는 레지던시를 우선적으로 선호할 수밖에 없다. 여행경비와 체류경비 등 경비 일체를 제공하는 소수 레지던시들도 물론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스코틀랜드 코브, 글랜피딕, 네덜란드의 레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 등이다. 그러나 이런 꿈의 레지던시들은 뛰어난 작가들을 발굴하는 만큼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해당 국가에서 지원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것도 방법이다. 런던의 acme와 프랑스의 CAMAC은 작가가 해당 국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한국 예술문화위원회와 지역문단체에서도 해외 특정 기관과 제휴를 통해 국내 예술가의 레지던시 활동을 장려한다. 이 때 레지던시를 실제로 방문한 동료 예술가들로부터 다시 한 번 검증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무조건 이상적일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라.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레지던시는 일정 수준의 비용을 받는다. 그들도 레지던시로 수익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예산과 만나는 합리적인 수준의 비용을 따져봐야 한다. 레지던시에서 비용을 받는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유럽의 살인적인 물가에 비하면 명목상의 비용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예술가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혜택 중 하나이다. 물론 모든 레지던시가 선의만으로 운영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레지던시는 “예술”이라는 단어만 제외하면 호스텔 홈페이지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희망 레지던시를 파악했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지원을 준비한다. 서류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디렉터에게 메일을 보내기를 조언한다. 홈페이지에는 개제되어 있지 않은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추가적으로 물으면서, (예: 추가적인 펀딩 기회가 있나요? 자동차를 렌트할 수 있나요?) 자신을 잠재 입주작가로 어필하는 기능도 있다. 단, 지나치게 창의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을 취하지는 말길 바란다. 정중하고 진지한 어조로 레지던시에 관한 관심을 표명하고, 예술 창작에 관련한 관심사를 소개한 뒤, 필요한 질문들을 묻는 것으로 충분하다.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레지던시라면 각자의 비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춰 지원자를 선발할 것이다. 작가들에게 포트폴리오는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지원서로는 타협할 수 있다. 지원서는 대부분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및 자기소개서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는 자기소개서(작가노트)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어필할 수 있다. 일부 시각예술가들의 작가노트에 보이는 문제점은 난해한 비평글의 문체를 어설프게 표방한다는 것이다. 거칠지만 솔직한 언어, 자신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거친 언어의 버퍼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한 표현이 범람하는 문장은 문제가 된다.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 혹은 두 개다. 세 개가 넘어간다면 그것은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재미있는 / 장난스러운 / 해학적인 / 위트있는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가? 모두 같은 대상과 상황에 쓸 수 있는가? 각 형용사의 온도와 리듬은 동일한가? 비단 레지던시 지원서의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을 뭐라고 부르냐하면, 그게 바로 예술이다.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다고 뭉뚱그려 보는 것의 섬세한 차이점에 집중하고 고유의 특수성을 살려 정확함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다. 예술의 보편적인 규정은 아닐지언정, 예술의 지향점으로는 충분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지인 예술가들이 레지던시와 관련해 물어오는 문의 중에서 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언어’ 이슈이다. 나는 영어가 자유로운 편이었고, 출판된 책의 상당 부분은 레지던시 디렉터 및 입주작가들과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유창한 언어는 물론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시각 언어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아티스트 런 레지던시 디렉터는 기관 레지던시보다 예술가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와 매너이다. 아시아 작가들은 성실하고 차분하다는 장점과 동시에, 수줍고 소심하다는 부정적인 태도가 지적된다. 반면에 지나치게 개인적이라는 점도 동시에 지적된다. 아마도 젊은 아시아 작가들에게는 다양한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노출된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력보다 거만한 태도를 환영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을뿐더러, 이미 뜨내기 예술가의 태도에 지쳐있는 디렉터도 많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북미와 유럽 작가들은 아시아 작가들에 비해 협업과 토론 문화에 익숙하며, 우리는 예술가 커뮤니티에서 동료나 연대의식이 편협하고 일반적으로 오픈마인드가 부족한 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쓴 책의 결말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냐면, “예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섬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전세계 예술가 네트워크로 지지되고, 심지어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기행을 통해 깨달았다.” 지금도 가끔 지칠 때면 이 문구를 보곤 한다.

자, 그럼 서퍼여러분, 행운을 빈다!

 

글。 조숙현

연세대학교 영상 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졸업하고 영화전문지와 미술전문지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10년간 글을 기고해왔다. 저서로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보기>와 <서울 인디 예술 공간>이 있다. 예술 서핑 보드에 몸을 의지한 채 파도와 씨름하며 리듬에 몸을 맞춰 살아온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newpublicart@gmail.com

그림。 황영아

미국 LA에 거주하는 작가다.

 

조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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