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한 세계에 대한 미학적 대응

졸속한 세계에 대한 미학적 대응

 

육지인의 눈에 제주비엔날레는 그 방점이 비엔날레보다는 제주에 찍힌다. 비엔날레야 이제 흔하디 흔한 국제 미술 행사에 불과하지만, 제주라는 지명이 붙으면 광주나 평창과는 질적으로 다를 비엔날레일듯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우리 같은 육지인에게 제주는 특별하다. 주제가 관광이든 뭐든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다른 비엔날레처럼 제주비엔날레도 주제가 붙고 그에 따른 다양한 부대행사와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오프닝도 다른 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도립 미술관이나 현대 미술관 전시도 고만고만 여느 큰 미술행사스러웠다. 몇 개국에서 몇 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했다는 것도 그냥 더 많고 적은 정도의 양의 문제에 불과했다.

문제는 제주 자체에 있다. 제주가 워낙 한국이라는 육지와 식생대조차 다른 화산도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환경과 ,그 속에 고립되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풍습, 그리고 그들이 겪어가고 있는 역사도 달랐다. 그 격렬한 차이 때문에, 또 그 차이로 초래되는 제주의 고유성 때문에, 일반적인 양식의 예술적 관념과 실첨으로는 제주를 담아내고, 이겨내기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을 우리가 통상 한국에서 경험했던 비엔날레로 담아내기가 버거운 것이다. 원도심이라 불리는 구도심도 그렇고, 무엇보다 알뜨르라는 모슬포 인근의 일제시대 조성된 비행장과 격납고, 그리고 섯알오름에 묻혀있는 4.3 유적지는 그 존재 자체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검은 흙으로 덮인 들판, 거칠게 부는 바람, 아담한 둔턱처럼 보이는 둔탁한 콘크리트 위장 격납고,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 등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출렁거리고 격동한다. 그 사이를 무심코 오가며 농사짓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꽉 찬 정물이고 풍경이며 개념이었다. 섯알오름 주차장에 있는 거대한 조형물들은 억지스러웠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갑오년의 농민군, 위안부 소녀상, 세월호의 노란 리본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형물을 병치시켜서 한국 근현대사를 호명하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만들었으나 주변과 전혀 어울려 들지 않았다. 따로 뻘쭘했다. 그냥 격납고 주변에 똥막대기만 꼽아도 외지인들 눈에는 충분히 놀랄만한 경관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주라는 특수성이 돌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엔날레란 도리어 제주다운 것을 현대 미술이 포괄하는 동시대성으로 포섭하려는 일련의 시도처럼 보이게 된다. 제주비엔날레는 2017년이란 시간과 그 시간 속에 붙어 있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재편되는 공간이 초래하는 현실을 제주에게 확인시키려는 어떤 의지처럼 보였다. 제주가 제주로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어떤 흐름에 대한 대응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고립 때문에 생겨난 고유성이 고립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지 않으면 제주가 제주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에 대한 반응처럼 보였다.

본시 비엔날레같은 외재적인 문화적 행사는 대부분 돌발적으로 결정되고 졸속적으로 시행되기 마련이다. 졸속과 부족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화 예술적 행사에 언제나 따라붙는 어휘다. 졸속하게 추진되지 않은 사업이 없고, 예산이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다. 이렇게 항상 반복되는 문제는 구조적일 수밖에 없다. 결과를 보나 안보나 이미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졸속하고 부족한 행사나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묻는 것도 그 행사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떤 강박적인 결정이 암묵적으로 개재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합의가 되지도 않았고 준비조차 할 여유도 없이 특정집단과 소수의 관계자가 눈 질끈 감고 저질러 버렸다는 듯이 어느 날 갑자기 비엔날레 개최는 날치기처럼 정해지고, 얼렁퉁탕 준비되고, 좌충우돌 진행되었다. 이렇게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어쩌면 영원히 시작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준비가 안 된다면 안 된 채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급박한 그 상황이 무엇인지 우리같은 외지인들은 모른다. 출발하기 위한 출발은 영원히 출발하지 못하는 것이고 준비하기 위한 준비는 언제나 준비에 그치는 법이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지만 속히 시작해버리는 것은 졸속한 것이다. 졸속이란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대로 빠른 것이 좋다는 뜻을 내포한다. 졸속이란 어떻게 봐도 좋은 것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제1회 제주비엔날레는 졸속하고 부족한 채 시작하였다. 막상 오프닝 당일에도 도립 미술관은 계속 설치 중이었고, 개막 후에도 캡션조차 붙지 않은 작품이 제법 있었다. 현대 미술관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홍보되고 있는 정보와 진행되고 있는 전시 사이에 갭도 적지 않았다. 졸속한 시작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처럼 어디 이 졸속과 부족이 제주비엔날레만의 문제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졸속하고 부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얼토당토않게 우리가 사는 육지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제주에게 졸속하지 않고 보다 완전한 그 어떤 것을 기대하는 육지인의 판타지가 비엔날레에 투영되어 비엔날레의 졸속함이 더 부각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본다. 육지와 분리되고 고립되어서 육지의 대안이 되어가는 제주의 환상 자체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졸속한 세계의 피안이 될 수가 없다. 제주가 계속 제주로 남기 위해서는 그 바깥을 껴안아야 하고, 그 바깥에서 온 우리는 제주 안에서 우리 자신을 대면해야만 한다. 졸속한 출발이지만 비엔날레라는 미술의 제도 안에서 제주와 육지가 만나는 작은 새로운 통로가 되기를 기원한다.

일단 시동을 걸었고 시작하였으니 이제 제2회 비엔날레를 위해 졸속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은 지완의 비엔날레로 나아가고, 제주의 고유성이 육지와 육지 바깥 세계를 동시대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보편성을 발견할 수 있는 접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웅기, 미술평론, 아트플러그 이사장)

김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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