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것에 대한 무의미한 태도

 

무의미한 것에 대한 성실한 태도, 캔버스에 유채, 162.2 ×130.3cm, 2017

 

 

미색의 잘게 쪼개진 수천 개의 필획이 캔버스 표면을 반복적으로 가득 메운다. 난폭하게 휘두른, 필획이라고 하기엔 차라리 카드 전표에 쓰는 싸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합할, 자신감 넘치는 동시에 무성의한 자유 곡선이 그 잔잔함 위에 빠른 속도로, 난폭하게 기입된다. 이 캔버스는 미세한 차이로서 무신경하게 갤러리 벽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한쪽 벽에서는 마치 중학생 UCC 과제처럼 보이는 조악한 비디오 클립이 재생되는데, 작품이 제작된 경위를 설명조로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16년 12월 그림을 그려줄 안력 확보를 위해 직업소개소에 연락”해, “몽골, 우즈베키스탄, 한국” 국적으로 이뤄진 “노동자 연령 20~60대”의 “일일 노동자 10명을 소개” 받았으며, “소개비는 1인당 1만원”, “시간당 급여는 8천원”을 주고, 7일에 걸쳐 “지정된 색의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도록 했다. 이때 고용조건은 “성실함”이었다.[1]

 

이상은 이완의 <무의미한 것에 대한 성실한 태도>(2017)에 관한 묘사다. 설사 작가가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작품의 시각적 차원은 공히 단색화를 상기시킨다.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적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모노크롬, 혹은 미니멀리즘 양식으로, 후기식민담론과 함께 그 위치는 실로 다중적이지만, 작가마다 대동소이 한국적, 동양적 정신성을 강조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또한 그것은 스테디셀러이자 국제 미술시장의 잠재적 블루칩으로 주기적으로 주목을 받아왔으며, 최근엔 조앤 키Joan Kee의 이론적 성과와 함께 국제적인 지명도를 올린 바 있다. 이완의 필치는 단색화, 특히 박서보의 유명한 <묘법écriture> 시리즈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개념의 번역과정에서의 변형을 허락한다면, 다소 한국적 모더니스트의 자기반성이란 문맥에서, <묘법>은 미색 바탕을 마치 연필로 글자를 쓰듯 긁어내는 특유의 방식으로, 수련과 자기 성찰로서의 ‘수신’을 강조했다. 한편 다소 포스트모던한 독해로서, 글자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끊임없이 의미가 유예되는 이런 수행적 쓰기écriture는, 키의 말처럼, 쓰고 읽는 것이 검열당했던 70년대 유신 시대에, 읽을 수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진동하며 보는 경험 자체를 문제화했을지도 모른다.[2] 여기서, 이완은 자신의 작업에서 묘법에 부과된 수사를 그대로 적용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 이때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신을 비우는 수행의 과정은 시급 8천 원짜리 아르바이트의 “혼이 빠져나간” 반복으로, 또, 읽을 수 있고 없음 사이에서 진동하는 특유의 쓰기는 작품의 상품성을 보증하는 작가의 날림 서명으로 대체되는데, 그러는 가운데,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 즉, “무의미한 것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작가 자신의 “성실한 것에 대한 무의미한 태도”에 의해 물화된다.

 

실제로, 이완의 노골적인 무의미의 물화는 오늘날, 최소한 박서보의 예에서 친숙하다. 박서보가 수신을 통해, 정신성의 고양을 거쳐 몰아의 경지로 나아간다면, 그 종착역은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의 공장이었다. 유수의 상업 갤러리나 아트페어에서 단색화의 의미는 여전히 몰아로서의 자기수행 과정이었겠지만, 실상은 여기저기 장소에서 스튜디오를 구축하고 어시스턴트를 다수 고용해, 공장을 돌리면서, 노골적으로, 하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작품 제작을 위탁-수행한다는 의미에서의 몰아일지도 모른다. 비평가 로버트 모건은 박서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수가 작품을 제작할 때 작가 자신의 경험과의 괴리 문제를 지적한 바 있는데, 박서보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원천으로부터 물이 하나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고 하며, 자신의 작업이 “특정 의도와 상관없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한다”고 괴상한 답변을 했다.[3] 하지만 이런 모든 사실은 현대미술에서 평범한 일이다. 이런 공유된 냉소주의적 태도와 함께, 모던한 저자성과 원본성의 해체가 당연시되는 요즘, 제작위탁과 아웃소싱/오프쇼어링은 부정할 수 없이, 오늘날 현대

미술의 주요 제작 방법론이자 관례가 되었다.

 

모더니즘 스튜디오의 공장화와 포스트 모더니즘적 복제 담론의 관례화 사이의 제휴는 ‘이후’의 쟁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최근 한국에선 유명한 케이스가 있다. 유명 가수이자 비주류 “팝아트” 화가 조영남의 그림자 화가였던 송기창이 커밍아웃했을 때, 대작을 하게 한, 그러니까 거짓말을 한 이 늙은 예술가를 향해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에 따르면 조영남은 2016년 발표한 작품 중 200점 이상을 다른 무명화가 보고 대신 그리게 한 후 사인 정도만 넣었으며, 계약서 없이 점당 10만원의 저렴한 대가만을 지불했다. 이것이 노동 착취이며 탈법적인 행위임에는 이견이 없을 테다. 그렇다면, 정당하게 임금을 지불한다면 이 그림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 노동법적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엔 미학적 존재론의 쟁점이 첨예하게 압착되어 있는데, 분명한 것은 오늘날 보통 사상인 자본주의는 ‘예스’라고 외칠 것이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차이와 반복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저항 전략의 실패한 판본을 목도한다. 물론 이것은 공장화된 모더니즘 스튜디오의 상황과 정확히 같을 것이며, 문제는, 이완이 이런 후퇴를 순순히 수긍하거나, 보다 더 진지하게 수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완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고용주와 동일시하는 가운데, 퍼포머-일일 노동자를 ‘계약 아래에서’ 소외시키는데, 예술 작업 내적으로서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그러니까 실제 현실의 효과를 발생시키며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 ‘실제’ 고용주는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상이며, 작가 스스로는 “나쁜 자본가 흉내 내기”라고 이 작업을 설명한 것에 반해, 실제론, 정직하거나, 심지어(인종과 연령을 안배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기까지 하다.[4] 최저임금을 어기지 않았고,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으며, 국적과 연령의 ‘다양성’까지 강박적으로 안배했던 것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보다는 되려 동일시하는 데 있어서, 긍정 혹은 부정보단 몹시 냉소적이고 적확하게 체현한다. 뺑끼칠을 한 후 시급을 만족스레 받아가는 노동자와, 수백 수천만 원에 팔려나가는 이완의 서명이 있는 ‘작품’의 대비는 놀랄 만큼 오늘날의 고용 시장 그 자체를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작품은 보란 듯이 콜렉터에게 팔려 나갔다.) 이완이 이런 노동자와의 계약-퍼포먼스로 실제로 노골화하는 것은 그런 ‘문제없음’, 정당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모던한 위대한 정신도, 포스트모던한 정치적 올바름도 사고 팔 수 있다는 현실 법칙의 민낯이다.

 

이런, 말하자면 자본주의로의 과잉동일시는, 어쩌면 자본주의적 형식-환영이 자주 미학화하거나 감추는 그 냉소적이고 무성의한 얼굴을 미러링하며 폭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스템을 전복하지 않고, 시스템 속에 있는 균열을 확대경을 들고 찾아 내어, 그것을 파고드는 식으로, 극한의 냉소를 현전시키는 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비판적 방법론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것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관례화, 즉 팝아트의 복제 담론이 미학적 급진성을 상실한 채, 다름 아닌 상품의 차이와 반복이 되어버린 난점을 재귀적으로 관측하게끔 하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이런 전략은 자본주의의 폭력적 얼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과잉동일시 자신이 수용 가능한 ‘문화’로서 인준되는 순간, 그 자신이 굉장한 스펙터클-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간 결과로, 문화는 “급진적” 자본주의에 또 하나의 금박 장식을 추가할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어쩌면 그런 항상성 시스템에 한 차원을 더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판은 상황적 실천이다. 나중 일은 또 그 때 생각하자.

 

[1] 이완, <무의미한 것에 대한 성실한 태도>, 2017, 1채널 비디오, 3분 35초. 나레이션 중에서 발췌.

[2] Joan Kee, “Reading Park Seobo’s Ecriture in Authoritarian Korea”,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Minnespolis: University of Minesota Press.

2013), p. 231.

[3] Robert C. Morgan, “Seo-Bo Park with Robert Morgan,” Brooklyn Rail, July 10th, 2006,

Accessed: March 23rd, 2017, (http://brooklynrail.org/2006/7/art/seo-bo-park)를 볼 것.

[4] 김연수, “[이슈전시—이완 개인전] 무의미한 노동력이 예술이 될 때,” CNB 저널, 2017년 2월 17일, 접근:

2017년 3월 23일,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21385&sec_no=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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