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5끼의 잡채가 남긴 유산

좌혜선 ◦ 냉장고, 여자#1 ◦ 장지에 분채채색 ◦ 194x130cm ◦ 2009

 

할머니는 아들의 밥상에 3년 동안 매일 잡채를 올리셨다.

대학 1학년생이었던 나의 아버지가 밥상에 올라온 잡채를 보며 '맛있다'라고 말 한 이후로 매일, 당면을 삶고, 당근과 표고버섯과 대파를 채를 쳐 썰고, 기름에 그것들을 각각 따로 양념을 해 볶은 다음, 삶은 당면에 섞어 참기름과 간장과 설탕으로 간을 하는 길고 고된 과정을 기꺼이 하셨다고 한다. 우리 막내아들은 잡채를 좋아한다고, 신이 나 말하는 어머니의 미소에 아들은 이제 이 음식이 물린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며 아버지는 지금도 잡채를 보면 그 이야기를 하신다.

돌아가시기 전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헛것이 보인다고 했을 때에도, 침대 바깥에 무와 배추가 한 가득 있다며 왜 이것을 씻고 다듬지 않고 있냐고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인 것이 배추와 무였다니.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겨울이면 어른 허리 높이의 고무통 가득 배추를 절이고 세 개의 세숫대야 가득 양념을 만들어 김장을 했다. 양념에 버무린 배추를 바깥 잎까지 꼼꼼히 몸통에 감아 옹골차게 한 덩어리씩 비닐에, 그리고 상자에 넣어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 두 명의 조카딸의 집에 보내면, 그들과 그들의 남편, 아내, 그리고 여덟 명의 손자와 일곱 명의 손녀가 찬바람이 모두 지나가고 더위가 올 때까지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세상 곳곳에 흩어져 그녀의 김치를 받아먹던 이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사진에 절을 했다. 그리고 ‘옛날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그 상에는 할머니가 늘 해주던 김치와 잡채를 포함한 많은 음식이 남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있었고, 그들은 묵묵히 그 음식을 먹으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사업 실패와 이혼 후, 아버지는 단둘이 살게 된 고등학생 막내아들을 위해 매일 아침 밥상을 차렸다. 밥상이라고 해봐야 즉석밥을 레인지에 데우고, 포장된 설렁탕이나 육개장, 3분 요리 따위의 음식을 마트에서 사다가 데워 내놓는 것이었지만, 새벽녘 일을 마치고 들어와 아들을 깨우고, 그 아들이 씻고 밥을 먹기 까지를 기다려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영업용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에 누군가 아들을 얕보게 될까, 학교 멀리에 차를 세워 이만큼은 걸어 들어가거라 하고는 교문을 지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곤 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남동생이 지원한 모든 대학에 모두 불합격하고, 대학을 졸업한 여동생이 임용고시 준비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방 두 칸짜리 집을 얻어 그들을 불러 들였다. 가스레인지와 냉장고를 장만해 김치를, 반찬을 만들어 쟁여 두고 지난날 나의 할머니처럼, 그리고 아버지처럼 매일 아침 밥을 하고 국을 끓여 상을 차렸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아니 그저 내 피 속에, 피부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가 스스로 그렇게 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TV드라마에서 보았던 행동을 따라 했었던 것 이거나 누군가 나에게 해줬으면 했던 행동을 투영해 그대로 한 것 일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가족 모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부모님도, 동생들도 나에게 고마워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매일 새벽밥을 지으며, 나는 가끔 부엌 한 켠에 앉아 울게 되었다. 두 손 가득 장을 본 물건을 들고 걸으며 주눅 들게 되었다. 500원 싸게 산 간장 값에 기뻐하게 되었다.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이유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르지 않은 빨래에, 철 지난 반찬에 미안했다. 내가 만든 이 집이 그저 이런 집이라 미안했고, 이런 내가 그들의 어미가 아니라 미안했다. 그런 이상한 마음들에 목이 타 가끔 가슴을 부여잡게 되었다.

그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육체노동에 울고, 처량해진 스스로의 모습에 울고, 모자라는 생활비에 울고, 그러면서도 이유 없이 샘솟는 미안한 마음에 다시 울게 되는 자리였다.

동생들이 모두 뜻을 이뤄 내 곁을 떠나게 된 후로, 나는 쌀 한 톨 내 손으로 씻지 않는다. 살아있는 풀떼기 하나 집에 들이지 않는다. 냉장고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애써 모아둔 냄비세트와 식기세트를 결혼한 여동생의 집에 넣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산 밥그릇 두 개를 찬장에 올려놓으며 홀가분한 마음에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사먹지 않으면 안 먹을 테다.’하고 선언하는 하는 내가 안쓰러워 친구가 챙겨준 반찬들이 냉장고에 있어도 나는 그 문을 열기가 귀찮아 굶기를 자청했다. 홀가분하고 또 홀가분하여라 하고 창을 열고 하늘을 볼 때마다 홀가분한 나를 다시 만끽 하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가끔 이유 없이 무언가가 그리워 질 때가 있다. 홀가분하지 못한 책임과 그것을 내게 짊어준 존재들에 대한 막연한 마음에 먹먹할 때가 있다. 그것이 지옥이었는지 그 눈물을 후회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쉬이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평생 그렇게 살지에 대해 묻는다면 다시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잡채를 보면 할머니 생각을 한다. 매일 끝도 없을 것 같은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음식을 만들어 아들에게 먹이고 싶어 한 그녀의 마음과, 그토록 애써 지키고 싶어 했던 그녀 아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좌혜선은 1984년 제주 출생이다. 아홉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두 번의 개인전을 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요량으로 방을 얻어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마음으로 쓰고 그린다. 읽고, 쓰고,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이외의 것은 밥 먹는 일조차 버거워 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스스로가 천재가 아닌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피곤해진 인생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어쩌면 진짜로 진짜인 괜찮은 것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산다.

 

 

좌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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