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시간 속을 부는 바람

 강요배_구름이 하늘에다_162×130㎝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5

강요배_구름이 하늘에다_162×130㎝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5

 

 

‘방랑이 끝을 맺는 오두막에는 친구들과 한 마리 「예언의 새」가 있다. 친구들 중 한 녀석은 「나」이고, 다른 녀석은 「신(神)」이고 하나는 낯이 설은 친구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어마한 체험을 그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나의 체험에로 이끌어 그들과 더불어 한 세계 속에서 한 운명으로 존재하는 「나」를 분명히 확인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가 부르는 오는 날들의 예언의 노래를 듣는다.’

 

군대복무기간 중 휴가를 나온 1976년, 강요배는 제주시 관덕정 인근 대호다방에서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연다. 처음 썼을 작가의 글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작가는 각종 기고문, 전시수록글, 대담집 등에서 현실, 이념 이런 것들을 좀 더 넘어서 ‘삶 그 자체’와 ‘공존의 울림’을 최상의 가치로 삼겠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다.

 

삶이란 가치, 신, 인간, 자연 등 결국 어떤 대상에 관한 앎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는 21세기 현대사회를 소통과 공감의 시대라고 한다. 예술영역에서도 이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괄목할만한 결실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또한 예술인이 앞장서 이 시대의 문화를 이끌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국미술계에서 강요배는 그러한 예술인 중의 하나이다.

강요배(1952~ )는 한국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서 80년대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리얼리즘 회화와 역사 주제화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였고, 1992년 ‘제주민중항쟁’의 역사 인식을 담은 <동백꽃 지다>전은 제주 4·3을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화가로서의 노정에 뚜렷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또한 강요배는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인간의 감정서린 풍광’을 그리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화산섬 제주의 자연과 그 자연을 살았던 선조들의 고난한 삶의 역사를 그리는 작가만의 독자적인 화법은 치열한 작가 정신과 작품 세계의 독창성으로 인정받아 2015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 집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어떤 분야에서 주요한 가치를 인정받는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생각을 알아가고, 나아가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은 분명 우리가 세계와 소통하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번 <한국현대미술작가, 강요배: 시간 속을 부는 바람>전은 강요배작가의 초대기획전이다. 초기 습작시절 작품과 최근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작가의 삶과 예술정신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한국현대미술의 현 위치와 방향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올해는 1976년 제주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 이후, 40년 만에 제주에서 열리는 대규모 기획전으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강요배는 한국전쟁 중이며 제주 4·3항쟁이 막바지에 치달을 즈음인 1952년,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났다. 척박한 제주에서 넉넉하지 못한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소질을 간파하고 훌륭히 뒷받침한 든든한 후원자는 바로 부모님이었다. 작가의 부모님은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지닌 어린 작가가 무엇을 하든 십분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평생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강요배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강요배가 그린 초등학교 때의 작품들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무척 자유분방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 그린 <자화상> 1961, <만년청> 1962을 보면 얼굴, 줄기 표현, 그림자 처리, 주제의 구분 등이 정확한 표현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그린 <함박눈 오는 날> 1963, <축구생각> 1963, <새와 고양이와 강아지> 1964 등의 작품은 세상을 보는 생각과 표현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요배는 어린 시절부터 흉내 내기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자기 생산(self-production)의 세계를 가꾸었고, 그 연속성은 오늘날 강요배의 창작의 틀의 지지체가 되고 있다.

중·고등학교시절의 강요배는 역시 미술에 대한 꾸준한 열정에 파묻히고, 고향 제주를 벗어 서울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 회화과에서 미술전공의 길을 연다. 하지만 대학생 강요배는 그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서양철학과 동양사상, 세상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자신을 다듬고 다듬어 사고의 폭이 무척 깊어지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대학시절까지의 시간은, 대개 세계에 대한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해석과 기술을 담은 표면적인 메시지의 미술언어로 <변증법> 1975, <알베르 까뮈> 1975, <즉흥> 1976, <바다와 새> 1977, <꽃과 무기> 1977, <디아볼릭> 1977, <연> 1978, <빈곳> 1979 등의 작품과 같이, 여러 가지 가능성을 폭넓게 보여주는 자유롭고 다양한 양적 실험의 연속이었다.

1979년 대학졸업 직후부터 강요배는 서울의 창문여고에서 6년 동안 미술교사생활을 한다. 당시의 열악한 상황임에도 작가는 누구도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참신한 미술교육의 대안들을 실천에 옮겼다. 미술반 위주의 연례미술전을 전교생·교사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축제로 기획하고 공동제작 걸개그림을 반별로 제작해서 학교 건물에 걸게 한 일, 아이들이 직접 대본구성과 연기·촬영하고 스스로 슬라이드 영상극을 완성한 후 전교생을 대상으로 상영한 일, 아이들이 운동장 땅바닥에 주전자로 물을 뿌려 그림을 그리고 흙으로 형상을 만들어보게 한 일, 거울을 모아 한 데 이어 조형물을 만들게 한 일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이러한 미술교사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강요배는 기존의 미술교과서의 문제점을 파악·분석하고, 실질적 대안을 마련한다. 작가의 글모음인『방황』에 재수록된 ‘고교미술교과서의 내용분석(『교육현장』, 1985), 초등학교 1,2학년 미술교과내용의 문제점(『학원』, 1985)’에는 미술에 대한 신선한 해석과 진취적인 미술교육방법 등을 기술하고, 한국미술교육의 현주소와 한국미술교육의 나아가야 할 해법과 방향을 제시한다.

대학졸업 후 <골리앗 크레인을 내려오다> 1990를 그리기 전까지 10여년이 넘는 동안 강요배는 캔버스를 사본 적이 없다. 캔버스를 대신하여 값싼 종이두루마리 벽지를 펼치고 필요한 만큼 잘라 펜, 붓, 먹물, 포스터칼라를 사용하여 그렸다. 정통 유화는 당연히 그릴 수 없었다. 생활이 어려워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려고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이러니하게 현대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 정통적인 것은 답답하다는 저변의식 때문인지, 권위주의를 빼고 그린다는 평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접근하기 쉬운 매체·재료의 선택은 내용까지도 함께 자유로워진다. 결국 작가는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킬 수 있어 그리고자 하는 것을 마음가는대로 할 수 있었다. ‘생존’은 ‘삶’보다 더 강력하고 강렬하며 적나라하다고 하는 작가의 생각은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어진다. 그래서 한때 블랙홀 같은 신비적, 주술적 경향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생존의 사회의식’으로 간다. 가령 굵고 짙은 붉은색의 ‘生’과 ‘存’ 한자가 써진 <생존> 1980 작품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직설적으로 표현된 가장 초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실과 발언의 창립 멤버이기도 한 윤범모 미술평론가가 보여준 고려불화 100여점의 슬라이드를 통해 고려회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고, 탱화의 전통적 요소를 수용하여 걸개그림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동양사상에 현실사회를 대비한 <태극도> 1981, <나비> 1981, <꽃> 1981 작품은 걸개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80년대의 격변하는 사회 정황 속에서 방황과 사색의 담금질을 거친 강요배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역사와 장소의 기억을 되새기고 발언하는 삶의 현장 그 자체였다. 작가는 80년대 10년 동안 민중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서, 보수적이고 전위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현실은 무엇이고, 발언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적극적인 미술회복운동에 동참했다. 대학시절 쌓인 광범위한 인문학적 기초와 현실에 관한 실체적 접근태도는 젊은 작가 강요배에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인물의 형상 속에 복합적이고 풍부한 감정이나 사회적 연관관계들을 집약시켜 놓은 <대동> 1983, <유선생> 1983, <수위> 1984, <딸에게> 1984, <웅변> 1984 등의 작품은 작가가 1980년대 시도했던 문자도와 지판화, 그리고 다양한 재료의 삽화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액자 없이 아무렇게나 벽에 붙여 전시한 방식 등이 보통의 회화라기보다는 걸개그림이나 벽보, 굿그림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경향은 민중미술의 맥을 잇는 실천적 경향이 되어 역사와 현실에 기반을 둔 비판적 사실주의 조형언어를 세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같은 시기 작가는 출판사에서 다양한 일러스트를 그리고,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호에 소설가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 삽화를 그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낱장의 소묘들로부터 하나의 장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를 갖춘 연속그림으로서의 삽화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고, 강요배의 삽화는 문학적 서술의 한계를 상상으로 이끌어내어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데 그치는 보조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삽화를 그리는 1년의 시간은 제주 4·3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가 되어 자신의 삶과 역사를 들여다 볼 199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강요배는 1989년에서 1992년까지 3년 동안, 서울 근교 쇠락한 농가에 칩거하며 철저한 준비 끝에 제주 4·3항쟁에 관한 연작을 그린다. 1992년 「동백꽃 지다 - 제주민중항쟁사」전을 시작으로 1998년과 2008년, 3차례의 전시회를 가졌고, 화집 『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을 출간한다. 이 화집은 제주의 4·3항쟁을 보여주는 자료집으로 제주 민중들의 투쟁과 처참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삽화형식의 데생과 아크릴화로 표현했다. 회화적 구성과 극적 표현력에 관한 고민을 넘어서, 제대로 된 역사화를 그려야 한다는 막중함이 작가를 엄습하였지만 스스로 이를 견뎌 내었다.

누구도 쉽지 않았을 이러한 강요배의 일련의 작업들은 한국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젊은 미술인의 역동성과 사회적 관심으로 ‘탐라미술인협회’가 발족되고, ‘4·3미술제’가 열리는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4·3관련 전시회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꾸준한 전시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의 활동을 넘어서는 다른 4·3이 나오길 고대한다. 이제까지의 4·3보다 그 내면과 외연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가의 바람에 후배들은 답할 책임이 있으며, 상응한 노력과 결과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강요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4·3의 최종 목표는 화해다. 증오나 보복, 이데올로기적 승패를 가름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진상 규명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진상이 밝혀진 다음에야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한 화해만이 참다운 화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떠도는 영혼들을 신원(伸寃)해 주는 일 또한 시급하다. 통일을 위해서라도 우리 내부의 정리가 필요하다.’며 4·3의 진정한 의미와 지향점을 시사한다.

강요배는 20여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1992년, 40대가 되어 고향 제주로 돌아온다. 제주의 장엄한 자연을 맞닥뜨린 작가는 1994년 <제주의 자연>전을 열며 ‘북쪽 먼 바다로부터 하늬바람이 불어오면 바다는 크게 뒤채이며 일렁이기 시작한다. 세찬 바람에 휘몰린 바다는 물밑 바위들에 속이 긁혀 허옇게 뒤집힌다. 가파른 갯바위는 거센 물살을 가르고 베며 앞으로 나아간다. 맵찬 칼바람에 살점 깍이운 팽나무는 검은 뼈가지로 버틴다. 바람은 구름을 휩쓸어 황무지를 후려친다. 돌팍에 얽히고설킨 덩굴들은 가싯발로 바람의 가슴팍을 긁고 찢으며 저항한다. (중략) 고난의 땅을 온 육신으로 일구어 흙과 하나된 저 제주의 할머니, 저 분이 스러지면 누가 이 대지를 어루만질 것인가?’라며 당시 마음을 소회한다. 당시 출품되었던 <흙> 1992은 척박한 땅을 무심히 갈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바람이 이뤄낸 ‘제주도의 풍토와 그 속의 신산한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과 겸손한 마음’ 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아 있다.

일견 흘끗 봤을 때, 그가 ‘자연’을 그리는 것에 대하여 이제와는 다른 경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동백꽃 지다>에서 사람을 지워 보라. 배경만 남지 않는가? 그렇다면 배경인 자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고 역사와 시간이 깃든 그림들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작가의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단지 빌릴 뿐인 자연으로, 마음의 운동이고 조율이기에 작가만의 심상이 깃든 ‘마음의 풍경’으로 거듭난다. 또한 강요배의 풍경화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기에 고즈넉한 목가적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작가의 자연은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자연이기에 <해갈> 1992, <녹두꽃> 1994, <몽양의 하늘> 1995, <항> 2002, <못괭이> 2003, <물과 불의 산> 2010, <파도와 총석> 2011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풍경 이상의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었다.

제주에서의 삶은 강요배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 제주 섬 땅의 역사와 자연, 바람과 돌과 꽃을 그렸다. 작가가 ‘있는 자연’을 만나자 ‘강요배의 자연’이 분출하였다. 새로운 시간으로의 이끌림은 작가에게 한편으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움의 시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1998년 8월, 북한 금강산과 평양지역 문화유적답사는 작가에게 여러모로 적절한 기회가 되었다.

제주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강요배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금강산에만 있다는 ‘금강초롱’을 보고서 반가움과 동질감에 흡족한 눈빛이 번뜩였다. 작가는 ‘깊고 깊게 돌아 들어간 비밀스런 내금강 골짜기엔 곱게 씻긴 하얀 바위들과 연둣빛 물살이 찰랑대고 있었다. 거기 순수의 계곡에는 금강초롱꽃이 피고 있었다. 지상에 유일하게 여기 피어 있는 꽃,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피어 있었다. 골짜기에 피워낸 정수, 그것은 금수강산의 중심부에 피어난 겨레의 넋과 같은 꽃이기도 했다.’며 당시의 벅찬 감정과 통일의 소망을 피력한다.

제주로 돌아온 이후, 현재까지 제주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강요배의 사유의 흐름을 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하고 더불어 완숙하게 하였다. 그래서 ‘바람, 파도, 바다, 꽃, 고목, 팽나무, 까마귀, 소리, 춤, 스침, 스밈, 생존, 인간, 시간, 공간, 역사, 우주, 통시성…’ 등 강요배를 연상하게 하는 무수히 많은 단어들과, <폭수> 2007, <청시창> 2008, <우레, 바람, 나무> 2010, <개천(開天)> 2010, <노야(老野)> 2011, <팥배나무> 2013, <솟는 해> 2015, <창파(滄派)> 2015, <구름이 하늘에다> 2015, <흘러가네> 2015, <답청(踏靑)> 2015 등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작가는 자연, 예컨대 ‘흙’을 보려면 자연의 속살을 들여다 보기위한 필수과정으로써, 지질시대를 연구하고 지질학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바람’에 관하여도 바람은 공간을 통하여 이동하고 시간 속으로 분다고 한다. 나아가 우주도 역사도 나무도 제주도민의 기질도 마찬가지라며 바람의 의미를 통시적으로 확대한다. 이러한 작가관점의 최종 결론은 ‘생성’으로 귀착한다.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생겨나는 것으로서 새롭게 통일시키고 새롭게 만들며 새롭게 형성한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시간 속을 부는 바람>이 작가 특유의 까슬한 붓질과 빠른 필치로 바람의 흔적을 담아 ‘팽나무’라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과 동일체가 되기 위하여 꼭 움직일 필요는 없다. 나무는 가만히 있는데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 때문에 나무가 산다. 팽나무처럼 서서 그는 바람에 맡긴 자신의 미세한 변화를 숨죽이며 바라본다. 바람, 친구가 찾아오고 그는 곧 그와 동일체가 된다. 그의 관심은 온통 서로가 스미는 공존의 울림이다.’라며 팽나무에서 역사의 박동과 생명의 외침을 읽어내고, 동시에 자연과 자신의 통일과정을 거친다. 서로 다른 주체들 사이의 대립과 저항의 관계를 넘어 제주의 자연과 그 땅에서 사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제목을 <시간 속을 부는 바람>으로 선정한 것은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강요배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의 사유의 흐름, 시간과 공간,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사회현실참여 및 제주생활 전 기간을 통하여 통합과 조화를 중시하였으며, 삶과 예술이 일치되도록 묵묵히 실천해 왔다.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꿴다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의 삶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예술인의 소명은 자신이 사는 시대와 삶, 사상과 철학, 인간과 자연 등을 담아내는 것이다. 강요배의 조형언어의 다양성과 철학적 사유는 앞에서 살펴본 작가의 여러 입장과 함께 한국적이면서도 우리가 전통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시사 하는바가 크다. 현재 한국미술사상 미술인구와 미술애호 인구의 증가, 왕성한 창작 및 전시와 실험정신, 미술의 다변화 및 다양화, 미술의 상업적 성공, 외국미술과의 활발한 교섭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한국미술계는 최적의 호기를 누리고 있다. 반면 전통의 위축, 외래미술의 무비판적 수용과 범람, 작가들의 사상 및 철학의 부족, 미술교육의 불합리성 등 아쉬운 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강요배는 창작에 임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무엇을, 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하여 물음을 묻고 답하고 실천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자문과 나름의 해결을 찾고자 하염없이 매진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도 하나의 ‘바람’이라며 현재에 고착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퇴보이며 퇴보를 막는 것은 자기 반성이 철저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 작가는 철저한 성찰에 들어간다.

‘괜찮다 싶은 작품은 느낌마저 깊어요. 나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거기에 있어요 그림은 결국 마음의 심연을 캐는 작업입니다. 예술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라고 봐요. 사회에 꼭 기여해야 한다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냥 자기 혼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그걸 제대로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봐요. 사람한테는 그것도 어렵거든요. 그런데 나를 알려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저에겐 고향의 역사이고 시간속의 바람이었어요. 자, 마음의 눈으로 봐요. 그러면 만져져.’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술에 대한 강요배의 진솔한 태도를 볼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한 작가의 작품을 따라 가보면, 그 흐름에 놓인 작가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예술의 방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제주도의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풍토와 그 속의 삶을 바라보고 함께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감상자에게 전달되어, 자연스레 소통하고 공감, 공유하는 자리이길 바란다.

 

강요배_물비늘_112×162㎝_캔버스에 아크릴릭_2015

 

-강요배는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국민중미술 1세대 작가로서 80년대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의 동인으로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리얼리즘 회화와 역사 주제화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2년 ‘제주민중항쟁’의 역사 인식을 담은 <동백꽃 지다>전은 화가로서의 노정에 뚜렷한 지표를 설정해 주었고, 제주 4·3을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또한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인간의 감정서린 풍광’을 그리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화산섬 제주의 자연과 그 자연을 살았던 선조들의 고난한 삶의 역사를 작가만의 독자적인 화법을 선보임으로써, 치열한 작가 정신과 작품 세계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2015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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