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공존

 

광복 이후 국민국가(nation-state)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곧 70년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한국’의 미술이 해외에 진출한 때는 언제부터일까? 기록에 따르면 1953년 한국의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이 1953년 영국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린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공모전에 입선한 것이 처음이다. 그 이후 김흥수, 남관 등의 작가가 개별적으로 해외 전시에 참여했으나,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전시는 1958년 2월 미국 조지아대학의 프세티 교수의 도움으로 열린 <한국 현대회화(Contemporary Korean Painting)>전으로, 고희동, 박수근, 박서보 등 36명의 작품이 선보여졌다. 이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당시 국내 미술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한국미술협회를 중심으로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인도트리엔날레의 참여 작가를 선정해 내보내는 등 민간 차원에서의 해외 진출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의 국제교류에 있어 분수령이 된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이루어진 산업화가 경제 발전에 가장 큰 토대가 된 것은 물론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문을 열게 된 때가 1986년 아시안게임 개막으로부터 한 달 전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충분히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서 1993년 대전엑스포 등 국제적 행사를 연달아 유치하면서, 국제 사회로 진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진 것이다. 

특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과 광주비엔날레가 동시에 창설된 1995년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화했다. 또한 1998년 부산비엔날레(PICAF부산국제아트 페스티발), 2000년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가 연이어 출범했다. 이로서 ‘한국 3대 비엔날레’라는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사이 비엔날레는 일종의 ‘업계’로 구조화되었고, 미술계의 환경과 시스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제도로 특화되었다. 외국인 관계자의 방한 일정을 고려해, 최근 국내 비엔날레들은 짝수 해 9월에 몰아서 개막하는 추세다. 그 이후 지자체 문화 사업의 부흥에 힘입어 금강자연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인천여성비엔날레 그리고 2012년 출범한 프로젝트대전까지 국내 주요 도시마다 비엔날레가 열리게 되었다. 이들은 차별성 전략으로서 ‘장르’ 중심의 특수성을 설정하고 있다. 특히 비엔날레는 수도보다는 제2의 도시에서 열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 이유는 지방자치제 이후 각 도시별 지역 문화 마케팅의 한 방편으로 설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도시가 아닌 국가 단위로 확대시켜 살펴보면, 비슷한 이유로 최근 20년간 설립된 비엔날레의 대다수는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이 차지한다. 현대미술 전반을 다루는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 외에 다른 지역의 비엔날레 대부분은 미디어(서울), 사진(대구), 도자(이천), 자연미술(금강) 등 장르를 강화시키는 성격을 갖고 출범했다. 비슷한 작가, 비슷한 작품으로 채워진 대형 전시들을 반복적으로 생산해 내는 것에 대한 대안적 선택일 것이다. 이러한 굴레 속에서 한국 비엔날레의 역사는 어느덧 20년을 넘었다. 

한국의 비엔날레를 통해 많은 해외 미술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미술을 알게 됐다면, 반대로 한국 미술이 해외로 직접 찾아가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의 전시도 괄목할 만하다. <태평양을 건너서(Across the Pacific)>(퀸즈미술관, 1993), <Facing Korea>(드아펠, 2003)>, <유연성의 금기(Elastic Taboos)>(비엔나쿤스트할레, 2007), <박하사탕(Peppermint Candy)>(칠레 산티아고 현대미술관, 2007-2008), <당신의 밝은 미래(Your Bright Future)>(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휴스턴미술관, 2009-2010), <Korean Eye>(사치갤러리, 2009) 등의 한국 동시대 미술의 흐름과 경향을 압축해 소개하는 취지의 기획전이 이어졌다. 또한 2000년대 들어서는 해외 레지던시 등을 밑바탕 삼아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와 큐레이터가 늘어났으며, 심지어 국내 자동차기업이 해외 유수의 미술관을 10년 동안 후원하는 파트너십을 맺기까지 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써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는 경우, 반대로 해외를 한국으로 초청하는 쌍방의 교류 활동이 심화되는 것은 요즘과 같이 글로벌한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국가 간의 이동이 흔치 않았던 과거의 상황을 기억해 본다면, 일찍이 한국 미술의 국제화는 매우 전략적인 의지로 가능했던 일이었음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구체적인 사례로서 살피고자 한다.  

사실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이 처음 참여했던 것은 한국관이 개관한 1995년이 아니라, 1986년부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우리만의 독자적인 공간이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관의 일부(벽면 길이 20m)를 할애 받아, 이후 1993년까지 총 3회에 걸쳐 참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니스비엔날레에 나가는 커미셔너와 작가를 선정하는 주체는 마찬가지로 한국미술협회였고, 문예진흥원으로부터 800만 원을 지원 받았다. 참여작가 및 커미셔너는 다음과 같다. 제42회(1986년)에는 작가 하동철, 고영훈과 커미셔너 이일, 제43회(1988년)에는 작가 박서보, 김관수와 커미셔너 하종현, 제44회(1990년)에는 작가 홍명섭, 조성묵과 커미셔너 이승택, 제45회(1993년)에는 작가 하종현과 커미셔너 서승원이다. 1993년의 경우를 일례로 들면 작가와 커미셔너가 직접 그림을 들고 개막 이틀 전에 현지에 도착해 이탈리아 유학생의 도움으로 개막식 당일까지 페인트칠과 조명을 사다 달며 겨우 작품을 설치했을 정도로 넉넉지 않았다.

이후 1995년 자르디니 내에 정식으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오픈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의 참여작가로 백남준이 전시를 하면서, 독일관이 황금사자상을 받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백남준이 나섰다. 황금사자상을 받게 된 날 밤 리셉션에서 한국 미술가는 물론, 유수의 재벌가의 부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구동성으로 한국관을 짓자고 발의했다. 한국에 돌아와 백남준은 대통령을 만나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짓는 것이 한국미술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고, 대통령도 동의하여 문화체육부 장관에게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대전엑스포 미술전시를 기해 베니스비엔날레 집행위원장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와 밀라노의 무디마미술관 관장 지노 디마니오를 서울로 초청해 장관 주재로 오찬을 열어 정부의 의지를 전하고 협조를 청했다. 그러나 도시 전체가 문화재인 베니스에서 건물 하나를 짓기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에 백남준은 당시의 베니스시장이었던 카치아리 시장에게 그림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기회다. 내년이면 100년이 되는 베니스비엔날레의 장소에 아직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된 유일한 국가인 한국과 북한이 함께 참여해 핵문제를 문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냐”라는 내용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베니스에 국가관을 굳이 세워야 했을까. 한국관의 규모는 갤러리 정도의 작은 건물이지만 그 상징과 역할은 매우 크다. 왜냐하면 다른 비엔날레는 몰라도 베니스에는 국제 미술의 중요 인사들이 일제히 모여들기 때문이다. 베니스비엔날레는 120년의 오랜 전통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네트워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미술의 해외 진출에 있어서 ‘전진기지’와 같은 한국관을 통해 한국의 많은 작가와 큐레이터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베니스라는 미술 접전지에 ‘돈’이라는 총알이 휘몰아치고 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2017년 현재 85개의 국가관을 준비하는 주체들 모두 ‘미술의 국제화’라는 미명 아래 경쟁적으로 예산을 쏟아 붇고 있다. 한국관 전시에 주어지는 정부 예산은 4억 5000만 원 정도이지만, 매년 외부 후원을 조성하여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리즘의 영향권 아래 후기 식민주의 이론이 진화하면서 과거 서구 중심적으로 전개된 미술사의 한계를 직시하고 지역적 특수성을 이해하는 개별적 접근이 강조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을 둘러싼 새로운 담론과 국제화의 흐름에 화답하는 작품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시도는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 반해, 좀 더 실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놓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시’라는 형태가 물리적으로 가시화되는 데에 필요한 제도와 예산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무릇, 제도는 각국의 역사와 사회의 규범이 축적된 것이며, 예산은 명확한 목적과 성과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정부 주체의 국제 교류 지원 제도는 전시나 학술 연구 등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자국 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국내 미술 부흥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관된 미션을 갖고 있다. 국제 미술계의 현장에서 세계 각 지역 정부의 지원 정책과 결부되면서 예술의 자율성의 발이 묶이는 장면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글로벌리즘 이후에도 베니스비엔날레가 여전히 국가관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일견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각 국가에서 끌어오는 예산과 타지에서 온 관람객으로부터 얻는 관광 수입 때문에 베니스비엔날레는 지금의 규모를 구현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최고의 비엔날레’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관은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각 국가의 미술을 대표하는 ‘선수’를 내보내며 국위선양의 제스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전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자와 작가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연 당신이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의 커미셔너나 큐레이터라면 어떤 주제를 걸겠는가? 또한 당신이 국가를 대표해서 나가는 작가라면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독창성을 내세울 것인가, 혹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조형의 언어로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근대성의 모더니티의 바깥에 존재하는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해당된다. 제니퍼 와이젠펠트는 국제화 현상이 부각된 미술계에서, 특히 아시아의 경우 전통의 수사학적 전개는 문화적 차이를 상품화하는 것으로부터 역설적인 포스트모던적 비판 형식으로 사용하는 것까지 사용되는 것으로 지적한 바 있다.  

내셔널리즘은 비단 19세기 만국박람회나 올림픽게임의 배경이 됐던 근대 사회에서만 19세기 근대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리즘과 여전히 양립하며 심지어 묘한 공존의 시너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상은 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가 글로벌리즘을 가리켜 표현했던 “다양한 배역들의 역사적, 언어학적, 정치적 상황성, 즉 민족 국가(nation-state), 복수 국적자들, 이주 공동체들, 국가 하부의 집합체 및 운동들로 채워진 상상의 풍경(imagenary landscape)” 속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계라는 복잡다단한 문화정치의 미로 속에서, 과연 그 탈출구는 어디일까?

 

호경윤 아트저널리스트

호경윤은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수료하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및 2013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부커미셔너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에서 강의하며, 오는 4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릴 <로터스 랜드>전을 준비하고 있다. 확장과 지속이 가능한 문화 생산 구조에 기반하여, 새로운 형태의 미술 제도를 모색 중이다. sayho11@gmail.com

 

그림。 김선숙

국제적인 화가로 작품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artistsunsook@gmail.com

 

호경윤

호경윤은 아트저널리스트다. 동덕여대 큐레이터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수료하고, 월간 『아트인컬처』 편집장 및 2013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부커미셔너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계원예술대학교 순수미술과에서 강의하며, 오는 4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릴 전을 준비하고 있다. 확장과 지속이 가능한 문화 생산 구조에 기반하여, 새로운 형태의 미술 제도를 모색 중이다. sayho11@gmail.com

Ho Kyung Yun

Ho Kyung Yun is an art journalist. She graduated from Dongduk Women's University with a curatorial degree and completed a specialization in art theory at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 He has been editor of the monthly Art In Culture magazine and commissioner of the Korean Biennale 2013 Venice Biennale. Currently, he teaches at the Fine Art Department of Kaywon Arts University and is preparing for the exhibition to be held at the Gwangju Asian Cultural Complex in April. Based on the cultural production structure that can be expanded and sustained, a new type of art system is being sought. Sayho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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