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염원들을 마주하는 진심어린 위령제 : 지슬

       우연하게 술자리에서 마주한 오멸 감독은 알고 보니 나의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응원하던 자파리극단과 테러제이(Terror J)의 수장이었다. 몇 년 전 별 기대 없이 극장에 갔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언제 한 번 기회가 된다면 직접 만나보고 싶었던 이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계에서 기념비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개봉 이후 4년이 지난 지금에서 뜬금없이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제주도에서 발생한 좌익세력이 일으킨 무장봉기에 대해 1948년 4월 3일 군정 경찰과 극우세력이 제주도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들은 전형적인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중심으로 나열하거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이해 당사자들의 심리상태를 중심으로 사건을 재해석하거나, 가상의 인물을 추가해서 기존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법들이 대표적이다. <지슬>은 기존 역사 기반 영화의 전형성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4.3사건이라는 역사를 불러들인다.

신위(神位) : 영혼을 모셔 앉히다.
구름 자욱한 하늘을 떠돌던 영혼들은 난장판이 된 연기 자욱한 방 한 칸에 군인의 모습으로, 좁은 구덩이 속으로 하나둘씩 마을주민의 모습으로 다시금 생전의 공간으로 돌아와 환생한다. 이야기의 시작이다.

신묘(神廟): 영혼이 머무는 곳
그들이 돌아온 곳에는 검은 현무암으로 쌓아올려 경계를 만든 올레길과 그 사이에 옹기종기 자리한 초가집이 있고 나이 먹은 팽나무가 있으며 여자의 젖무덤을 꼭 빼닮은 유려한 능선의 오름, 여자의 자궁처럼 땅 밑으로 깊숙하게 길을 낸 동굴이 있다. 군인들은 마을을 거점으로 뚜렷한 이유 없이 주민들을 학살하고 이에 겁을 먹고 동굴로 피신한 주민들은 동굴이라는 낯선 공간에서도 지슬(감자의 제주 방언)을 나눠 먹고 저녁 마실을 즐기며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음복(飮福) : 영혼(귀신)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주민들의 유일한 도피처였던 동굴로 군인들이 침범하는 순간 연기는 자욱해지고 서로는 각자의 생명을 내어주며 다시금 영혼이 되어 하늘로 향한다.

소지(燒紙) : 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
그리고, 그들의 염원은 65년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활활 타올라 재가 된다.

         <지슬>은 미처 이루지 못한 염원을 간직한채 희생당한 4.3 피해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늦었지만 그들의 염원을 이뤄주기 위해 뒤늦게 마련한 위령제다. 이런 접근법은 그 자체로 숭고함을 지니면서 영화에 유용한 윤활유 장치로 작용한다. 물론 이런 장치들이 제주 출생의 오멸 감독이 온전히 의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감독은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영화의 방식을 빌어 진심으로 4.3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진심이 영화에 가져다 주는 미덕은 의외로 크다.
영화의 외형적인 갈등요소로 작용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그들 모두 위령제에 모셔짐으로써 4.3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무력화시킨다. 물론 영화의 시작과 끝에 제시되는 나레이션으로 명확하게 가해자를 미군으로 규정짓지만 그들은 위령제에 초대 받지도 못했기에 이 영화로 향하는 비판의식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사건을 바라보는 일관된 비판의 시선이 부재하는 대신 그 공간을 메꾸는 건 마을 주민들과 군인들의 소박한 염원들이다. 마을 주민들은 엄마의 자궁처럼 깊고 어두운 동굴안에서 사라진 딸의 안위를 걱정하고, 마을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돼지를 걱정하고, 동네 노총각의 결혼을 걱정하면서 감자를 나눠먹고 서로간의 유대를 견고히 한다. 일방적인 가해자처럼 묘사되는 군인들조차 명분없는 명령체계에 따르지만 비정상적인 방법(마약, 무기에 대한 집착 등)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거나 조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결국 스스로가 위령제의 제물이 된다.
이 영화가 경이로운 점은 바로 영화내내 소박한 염원을 이야기하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와 그 장면들을 롱테이크로 솔직하고 진득하게 담아내는 카메라 앵글이다. 그들은 흡사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생각하려는 임신한 엄마의 자궁안 아이들처럼 어두운 동굴 안에서 당장의 생존을 걱정하는 대신 한없이 서로를 걱정하며 속삭인다. 그들이 제주 사투리로 나누는 이야기들은 다름아닌 제주 그 자체, 공간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고중사(이경식)가 순덕이(강희)를 유린하는 장면 이후에 등장하는 죽은 순덕이의 벗겨진 육신이 오름의 풍경으로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를 암시하는 동시에 곧 제주 전체가 유린당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는 흡사 강간을 자행한 당사자와 피해자의 상황과 유사해보인다. 강간의 가해자가 자의가 아닌 누군가의 지시 혹은 최면에 의해서 피해자를 범했다면 직접 가해자는 무고한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가해자 집단 내부(주정길)에서 먼저 가해자(고중사)를 응징하고 피해자(마을주민)들은 가해자(탈주한 군인)를 포용함으로써 비로소 위령제는 그 자체로 완전함을 간직한채 재로 소진된다.
이런 작위성 없는 감독의 진심어린 태도를 읽었음에도 나는 영화를 다 보고 극장밖을 나서면서 문득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치밀하게 구성한 연극 무대 같은 세트장과 각본을 통해서 강력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지슬>의 그것과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영화를 떠올린 이유는 필자에게 있어서 <지슬>이 제주라는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편의 장대한 연극 같았기 때문이다.

        영혼을 소환하고 그들의 이루지 못한 소박한 염원을 늦게나마 들어주고 이뤄주고자 마련한 위령제가 영화의 방식으로 치뤄진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스로 마련한 진심어린 위령제를 통해서 구름위에 뭉실뭉실 떠 있는 전설이 되었다. 부디 그들이 위령제를 통해서 충분히 위로 받았기를, 우리 또한 이 영화를 통해서 나름의 면죄부를 가짐으로써 각자의 소박한 염원들을 이루길 바래본다.

김영헌

김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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