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CTICE Everyday Life, Part I

잭 번햄은 1968년, 한스 하케와 로버트 모리스 등의 개념미술가와 미니멀리스트들이 주창했던 ‘형체를 없앤 명제’로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러한 관찰로 그는 기존에 이 두 진영을 다르게 범주화하던 관습을 깼다. 잭 번햄은 이들을 ‘경험을 창조해내는 큰 틀’로 음미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 관중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작품을 보는 사람의 존재가 예술작품의 필수 구성요소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후세대 예술가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했던 예술의 자주성으로부터 등을 돌려 예술가의 권위적인 목소리를 소멸시키는 한편, 관중의 참여라는 속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관중이 존재하고, 그들이 작품과 공유하는 공간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오브젝트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킨다. 번햄이 보기에 이러한 현상은 당시 기술적인 변화로 인해 나타난 “시스템 지향 문화(a system-oriented culture)”의 출현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다. 그가 정립한 “시스템의 미학”이라는 이론이 개방형 구조보다 ‘서로 침투하는 기능(systemic functionality)’을 공공연하게 우위에 두기는 하지만, 번햄이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의 모델에 관해 생각했던 부분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술가들은 보통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으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들은 예술의 대화라는 틀 안에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유지해 온 관중의 도전 의식을 북돋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작품의 형식 면에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계속 나타난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날의 예술작품은 비-예술, 즉 현실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떤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는 예술이라고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관중들은 그 작품에서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예술가들은 대개 관중에게 큰 영향을 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작품의 본질을 어느 정도까지나 관중에게 전달되게 할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흥미롭게도 1980년대에는 예술이 관중과 합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관중들이 서로 반대 의견을 갖게 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듯 하다. 섀넌 잭슨이 주장하듯, 반면에, 관중 간의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쪽을 택한다면, 관중의 예상을 재확인해 준다는 것 외에는 전자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에 잭슨이 제안하는 모델은 이렇다. 어떤 사회적 맥락 안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델이다. 물론 이 모델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예술가이다.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랐을 때, 사람들이 참여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특정 공동체의 특징적인 '증상'이 무엇인지를 규명해내는 것이다.

1980년대와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소원한 관계에 익숙할 것이다. 이 시기는 인터넷이 등장하고 발전해서 모두를 아우르는 네트워크로 발전해간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서서히 기존의 소통 방식을 대체하고 테크노크라시(과학 기술 분야 전문가들이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 및 사회 체제)로 진화했다. 근본적으로 인터넷의 논리는 물리적인 거리를 무시하고 사건들의 발생주기를 짧게 줄임으로써 현실세계의 시공간을 축약시키는 것이다. 인터넷이 작동하는 기제의 근저에는 개개인의 욕망이 있다. 그리고 인터넷의 중심은 개인의 상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가상의 현실이다. 이모티콘과 사진이 급증하는 가운데, 한담(chitchat)은 자신을 대표하는 형식으로 기능하는 듯 하다. 이는 기술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시각을 통해 전달되며, 이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린다. 소셜미디어가 연출해낸 무대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공상을 하거나 자신을 투영시키는 행위를 매일매일의 의사소통에서 할 수 있게 되고 이 내용은 일정 사람들의 범위 너머까지 도달한다. 재밌게도 그 이후로 이런 말이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다 각자의 거품 안에 살고 있다.” 메타구조의 현실성은 개개인의 현실성과는 다르다. 그리고 메타구조 안에 개개인들의 현실들이 가까스로 공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개개인들의 현실은 어느 정도는 허구화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테크노크라시라는 선상에서 표상과 제시 간의 경계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구경거리가, 보고 참여하는 방식에 있어 상호작용성이 매우 증가하는 쪽으로 각색되어 왔다는 것은 다들 인정할 것이다. 마치 앞서 언급했던 전후 예술가들이 했던 노력처럼 말이다. 소셜미디어가 일상에 침투한다는 것은 이러한 상호작용성이 삶의 모든 측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흔히 기술이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실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유가 독립성과 밀접하다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은 군중의 기대로 선택하게 만드는 강압의 논리를 내재화한 정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상상속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믿기 어려운 미국 대선 결과는 이러한 교묘한 조작 방식에 대한 증거이다. 이 시대의 언어 덕분에 트럼프는, 실제 연설을 전혀 하지 않고도 당선이 되었다. 연설 대신에 그는 거의 연기에 가까운 형식적 태도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트럼프가 선거 운동 때 보인 것은, 제각각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몸짓과 감정표현으로 구성된 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사회 구조가 가진 조작의 논리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인지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을 생각했다면, 이번 선거 결과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데 있어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 일상에 뿌리내린 이런 방식에 대한 대안적인 모델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안이 반드시 새로운 것일 필요는 없다. 우정이라는 오래된 개념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우연하게도 우정은 현재 위험에 처한 사람 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문제를 드러내고 권력관계를 드러내기만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부족할 것이다. 관계의 소원함이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과 관계맺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오랫동안 인지해온 모두에게 내재화되어 있다. 이제 문제는 테크노크라시 사회의 규정 안에서 견고해진, 우리 삶에 깊이 뿌리내린 이러한 관습을 넘어서는 관계 방식을 어떻게 조성하고 발전시켜 나갈까에 대한 것이다.

칭 후안

뉴욕대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평론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미술에서부터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현대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sphlwog@gmail.com

- 2부에 계속

칭 후안

뉴욕대 석사과정에 재학중인 평론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중국미술에서부터 전반적으로는 전세계의 실험적인 현대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sphlwog@gmail.com

Huang, Qing

Currently based in New York, Qing Huang is M.A. candidate at Institute of Fine Art, New York University. Her academic interests range from modern and contemporary Chinese arts to experiential-oriented reflection on global contemporary culture in large. sphlwog@gmail.com

삶을 담아낸 말, 셔머샤 네이
이혜령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취향을 말할 때
양민희
고생하며 여행한다는 것
류연우
졸속한 세계에 대한 미학적 대응
김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