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1 Sun에게

 

곽선경 ◦ Rolling Space(공간 말기) ◦ 2015 ◦ digital print on poly vinyl chloride ◦ 213 x 626 cm ◦ 사진:갤러리 스케이프 제공

 

Sun에게,

       몇 년 전인지 이제는 까마득합니다. 당신의 작품, 아니 당신을 처음 만났던 때로부터 벌써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제 스스로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어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지금에서야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2009년 브루클린 미술관의 《Enfolding 280 Hours》라는 개인전이 처음 당신을 만났던 날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에 검정색 마스킹 테이프로 거대한 미술관 한 층 공간을 꽤 오랜 시간(280시간)에 걸쳐 물결치는 드로잉으로 바꿔 놓았다는 사실 보다, 오프닝 당일에도 진행되고 있었던 드로잉 작업을 만들고 있었던 당신의 움직임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뒤, 아마 2010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 몇 차례 당신께도 이때의 감흥을 말씀 드리기도 했었지요. 쿠바출신 무용가 주디스 산체스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던 공연이었지만, 전 도입부에 진행 되었던 당신의 퍼포먼스가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검은 색 옷을 입고 무대 밑에서부터 검정색 테이프 롤을 조심스레 뜯으며 무대 위를 짚고 올라오면서 당신이 만들어 내는 테이프의 선들과 뜯어내면서 나는 소리는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마치 테이프의 선과 하나인 것처럼 보였던 당신의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진 검은 선의 드로잉, 그리고 조용한 동작들과 상반되는 테이프를 뜯는 이질적이면서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객석에서 숨죽이며 바라보는 수많은 관객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 당신의 행위를 증폭시키는 것만 같았습니다. 테이프를 뜯는 소리가 반복되고 리듬을 만들면서 검은 테이프와 당신은, 마치 몸에 수없이 감겨 있는 검은 선들을 조금씩 풀면서 무대 바닥에 드로잉을 만들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드로잉을 만드는 당신의 검은 움직임은 무용수들이 하나 둘 등장하며 그들에 의해서 메아리처럼 반복되면서 그렇게 당신은 무대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무용수들의 퍼포먼스와 음악이 기다렸다는 듯 흐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전 당신이 사라지고 난 그 이후가 어떻게 전개되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마음속에는 먹먹한 감정만 계속 남아 맴돌고 있었습니다.

극도로 절제되었던 당신의 반복적인 움직임. 

마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 검은 테이프로 그리는 드로잉.

그리고 공간을 고요하게 울렸던 테이프를 떼는 소리. 

어찌 보면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당신을 감싸고 있는 음악처럼 간결하고 조용하지만 격정적이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만들어 내는 드로잉 선들이 당신의 연장(extension)이라고 했던 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는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간과 드로잉의 선과 당신이 아름답게 하나로 보였던 순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제가 느꼈던 그 정체 모를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려고 적당한 언어를 찾으려 했던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전 여전히 제가 느낀 그것이 무엇 이었는지 도대체 무엇이 제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잡힐 듯 말 듯 그렇게 줄다리기 하듯이 전 일단 그 상태로 그냥 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고 있으면 언젠가는 제가 만족할만한 답을 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 퍼포먼스 이후 당신과의 간헐적인 만남을 통해서 제 답답함이 눈 녹듯 풀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보다 그렇게 쉽지는 않더군요.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단 몇 년간 당신과의 만남으로 몇 십 년 동안 축적된 시간의 깊이를 다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뉴욕 작업실에서 혹은 한국에서 드로잉이나 탄성 있는 천 재질의 개퍼 테이프(gaffer tape)를 이용해 만든 알록달록한 조형물들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짧게나마 나누면서, 전 조금씩 거대한 공간 속 검은 마스킹 테이프 드로잉의 물결 아래에 수십 수만 겹의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냈을 당신의 모습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 당신의 작업실에서 보았던 종이 위의 끄적거림이나 주변의 철사들로 아무렇지 않게 만든 듯 걸어 놓은 조형물 혹은 개퍼 테이프를 여러 겹 감아서 만든 덩어리들로부터 차곡차곡 축적되어 시작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치밀하게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닌, 정말 어린 아이가 주변에 자신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물건들로 이리 저리 장난치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천진함이 당신의 작업에는 있었습니다. 그것이 꽤 오랫동안 미술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져 있는 저에게, 미술 이전에 인간의 단순한 유희적 동기와 쓸모 없어 보이는 행위의 축적, 그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무언가가 가지는 무게가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사소한 것, 익숙한 것이라고 더 들여다 볼 기회를 주지 않은 것들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지 당신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의미에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것만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힘을 지니게 됩니다. 오랜 시간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느꼈을 외로움, 좌절, 막연함이나 고통들이 같이 버무려져 말끔하게 정리된 듯 보이는 표면을 중심으로 꽉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8년만의 한국 개인전《125 Rolls of Winding, 48 Layers of Piling, 72 Yards of Looping》의 제목을 듣고, 그런 긴 과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뻐근해 왔습니다. 전시된 개퍼 테이프로 감아서 만든 유기적 형태의 조형물들, <15 Rolls of Communication>(2014), <Your Portrait>(2013), <43 Rolls of Winding>(2014) 그리고 <41 Rolls of Winding>(2008)을 보면서,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장에 고요하게 놓인 그들은 어찌된 연유인지 제 눈에는 생생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음은 왜일까요?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던 오후, 유독 나른하게 느껴졌던 당신의 스튜디오에서 테이프를 감고 있거나, 철사나 전선을 꼬고, 종이 위에 드로잉을 그리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자꾸 오버랩 됩니다. 그리고 신작인 <Handsaw Marks in 16 Beats>(2015)를 만들 때 당신도 그 소리의 리듬과 움직임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지요. 작은 톱으로 제각각 두께와 색깔이 다른 개퍼 테이프들이 길게 연결된 단면을 잘라내면서 나는 소리들과 톱이 끈적한 테이프의 단면을 가르며 만들어 내는 표면은 묘하게도 당신의 검은 테이프 드로잉을 닮아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전 스튜디오 한 쪽에 가득 쌓여있던 종이 위의 드로잉들을 다시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여서 얼마나 좋았던지요. <Times Composed V>(2008), <Times Composed VII>(2008), <Times Composed VIII>(2008)와 같이 과거 드로잉들이 서로 다른 시간을 넘나들며 한 공간에서 만난 장면을 목격하면서 전 이질적이지만 일관된 당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 당신의 스튜디오 벽에 걸려 있었던 <Following Dots and Lines: Illusion>(2011)나 철사로 엮어서 만든 아름다운 조형물인 <Sewing Space>(2013)를 보면서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공간을 점유하는 테이프 드로잉들이 사실은 이렇게 반복적이고 섬세한 드로잉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답니다. 드로잉들에서의 가벼운 자유로움이 개퍼 테이프로 만든 조형물들에서는 마치 당신을 스쳐가는 시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로 꾹꾹 뭉쳐져 있는 것만 같아 사실 마음 편하게 바라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감았음에도,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색깔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으로 시치미 떼듯 감추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참 무서운 것이 숨기려 하고 감추려 해도 어떻게 그렇게 고스란히 드러나곤 하는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또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영 몰라주고 가라앉아버리면 사실 섭섭할 것 같거든요. 

 이번에 조금씩이나마 당신이 해왔던 작품의 주요 가지들을 전시장에서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간에서 펼쳐져 보이는 검정색 테이프 드로잉이 가장 전달력이 좋으면서도 또 그 반대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신의 작품 중 제일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참 묘하게도 테이프 드로잉은 종이 위에 그려진 드로잉들의 자유로움, 가벼움과 함께 묵직한 고집스러움도 같이 지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둘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맞추면서 다 내보이지도, 또 다 숨기지도 않는 것 같아요. 만약 다 숨기려 했다면 그것이 드러났을 것이고, 전면에 내세웠으면 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전 그저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테이프 드로잉이 공간에 펼쳐져 한 눈에 들어와 버리기에 그게 다 인줄 착각하게 만드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보였으면 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제가 조바심이 났던 모양입니다. 아마 종이 드로잉, 철사나 전선을 꼬아서 만든 조형물, 검은색 테이프 드로잉, 그리고 개퍼 테이프로 감아서 만든 조형물 모두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평형이 맞춰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당신에 의해서요. 어쩌면 제가 상상하는 무언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신 신작 <60 lb of Dust, 2 kg of Sand, 32g of Ash>(2015)를 기점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발화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 얘기들이 당신에게는 굉장히 모호하게 들리실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제 생각을 두서없이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상당부분이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이성복 시인이 쓴 시론 『무한화서』탓일지 모릅니다. ‘모호한 게 제일 정확한 것,’ 왜냐하면 바로 ‘인생이 본래 모호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또 아무것도 쓸 자신이 없다고 느낄 때가 쓰기 시작해야 할 순간’이고,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 용기를 내어 이 편지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시에 대해서 얘기하는 많은 부분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공감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뿐만 아닌 모든 예술에서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자신의 시론 에서 시를 ‘무한화서’(그의 설명에 의하면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바깥으로 피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구심성)이라고 해요)에 비교하며,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이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복되는 실패의 사이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의미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때론 시대를 초월한 힘을 지니며 곱씹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당신의 작품들이 그렇게 계속 저에게 주었던 울림을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8일-11월 15일 갤러리스케이프에서 열린 곽선경의 <125 Rolls of Winding, 48 Layers of Piling, 72 Yards of Looping>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맹지영 

맹지영은 큐레이터이자 평론가이다. 현재 두산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예술에 관한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10여년간 미국에서 미술관련 공부와 실무를 경험한 후 2011년 귀국했다. 한국에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 후 미국 매사츄세츠 주립대학교와 스쿨 오브 비쥬얼아트에서 미술 실기와 이론(평론)으로 석사를 마쳤다. 그는 전시와 글을 통해 대중이 느끼는 예술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 <스몰토크, 뉴욕에서의 대화>(2014)가 있다.

 

맹지영

큐레이터이자 평론가이다. 현재 두산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활 동하면서 예술에 관한 글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10여년간 미국 에서 미술관련 공부와 실무를 경험한 후 2011년 귀국했다. 한국 에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 후 미국 매사츄세츠 주립대학교와 스쿨 오브 비쥬얼아트에서 미술 실기와 이론(평론)으로 석사를 마쳤다. 그는 전시와 글을 통해 대중이 느끼는 예술과의 거리감 을 좁히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 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 (2014)가 있다.

Jee Young Maeng

Jee Young Maeng is a curator and critic. She has been a curator at DOOSAN Gallery since 2009, and also constantly contributes her writings on arts. She has studied art and has worked in the field in the United States for more than a decade and returned to Korea in 2011. She studied fine arts and criticism from Sungkyunkwan University in Korea, University of Massachusetts Dartmouth and School of Visual Arts in the United States. She is interested in finding ways to bring the public closer to art via writings and exhibitions so that individuals can live within their own art. Her book, Small Talk, Conversation in New York, was published i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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