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취향을 말할 때

 

톰 밴더빌트의 <취향의 탄생>을 읽고 씁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이하며, 친구와 어둑해지는 강둑을 걷습니다. 벌써 몇 시간이나 떠들어댔지만, 우리의 대화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만들어 먹었다는 감자 짜글이 레시피부터, 꼬리뼈께가 다 까지도록 타고 있다는 공유자전거 따릉이, 비 오는 날 함께 본 영화 레이디 맥베스, 꽤 과감한 새 정부의 부동산 정책,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그녀의 새 남자친구, 메갈과 일베까지......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법 닮아온 친구이지만, 우리의 좋고 싫음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만 보면 취향이 다른 것이 우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세분화된 취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때때로 이들이 크로스 오버되며 일면만으로 그 사람의 취향을 짐작하기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클래식을 좋아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빨간 뚜껑 소주라든지, 진보 성향의 그녀가 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싫어한다든지,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가 페미니즘의 가치를 역설하는 식입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재생 목록만으로도 취향을 예측할 수 있었고, 패션만 보아도 계층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데 말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스스로를 복잡하고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오글오글 제 얘기를 뿜어대는 세상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진다고 하니 과연 취향도 '발견 discovery'이나 '큐레이션 curation' 이니 하며 '완화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취향은 대체로 표현의 자유라는 대전제 아래 안전하길 희망되어집니다. 요즘 말로 "취존 : 취향이니 존중하시죠"인거죠. 때때로 어떤 이들은 '거절을 거절'하며 '배척에 대한 더욱 강한 배척의 선'을 긋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누군가의 취향이 상처와 혼란이 되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부정적 의견, 적대적 감정, 욕설 같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표현들 때문에 숨이 막혀옵니다. 얼마 전에는 타임라인에서 '속이 시원해지는 여 전화 상담원의 대응'이라는 통화 녹음 영상을 보며, 대낮에 오한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네, 시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집단적인 혐오표현 앞에서는 더욱 두렵습니다. 무리 지어 서로를 배척하며 싸우고, 온라인상에서 과감히 반인륜적인 취향을 드러내며, 감히 취향입네 표현의 자유입네 할 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며 지키려 했던 것이 저들의 표현의 자유였다니, 저들을 위해 기꺼이 제 몫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한없이 역행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크나큰 차이가 없는 한 타인과 자신이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는 전제 아래, 저들, 그리고 우리, 또 나의 취향은 과연 보호 받아 마땅하며,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걸까요?

 

이 끝없는 논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톰 밴더빌트의 책은 우리의 취향이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분명한 취향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그리고 그러한 인지가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과학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밝혀줍니다. 부족한 경험, 선호 자체에 대한 선호, 허위 합의, 잦은 노출로 인한 선호 등 왜곡과 조작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취약하고 제멋대로인 취향에 집착'하며 '보이지 않는 청중'을 위해 '자기를 기만'하기도 하는 것이 인류의 '생존 전략' 중 하나라니, 우글우글 생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또는 욕망의 분출구를 찾으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혐오의 표현조차 한없이 가여워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탑다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마저 이미 밝혀졌다고 하네요. 우리가 취향을 파악하고, 스스로를 타인과 구분하며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동안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선 조용한 구석에 앉아 오직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고백하건데 저는 삼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키 작은 사람을 싫어했습니다. 개인적인 불행의 순간마다 키 작은 사람이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우연으로 비롯된 편견이었습니다. 제가 약한 것이나 또는 우연의 결과로 그런 세상을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강한 힘이 제 인생에 존재했다는 환상을 품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에 빠지려는 노력은 적응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축적한 결과'라고 하니, 제 생존 기술도 생각보다 쓸 만하네요.

 

밴더빌트씨는 취향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끝내 결론은 내리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가 책의 가장 앞에 담은 니체의 인용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친구, 자네는 '실제 맛'과 '느낀 맛' 사이에 충돌이 없다고 생각하나? 인생은 모두 둘 사이의 충돌일세"

 

제 인생에서 취향은 계속해서 바뀌겠지만, 나만의 좋고 싫음을 벼려놓는 일은 분명 근거 있는 나르시시즘의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양민희

세밀한 흑백 작업을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펜과 연필로 그리고 있다. instagram@jojinjoo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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