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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감독의 영화 <아파트 생태계>는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읽으며 세운상가를 서성이는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995)은 지금은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감독인 유하가 말랑말랑한 감수성의 시 쓰는 청년이었을 때 쓴 시집으로, 유하는 ‘시인의 산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다. “시간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난 자꾸 멈칫멈칫 뒤돌아본다.” 앞서 달리지도, 약삭빠르지도 못한 두 창작자가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공통적이지만, <아파트 생태계>의 등장은 시기적으로 꽤 절묘하다. 최근 한국 주택시장의 뜨거운 이슈는 아파트 재건축이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사업으로 불린 10조짜리 반포주공1단지는 현대건설이 GS건설을 제쳤고, 잠원동 한신 4지구는 GS건설이 롯데건설을 제치고 재건축 시공권을 따냈다. 5930세대에 달하는 둔촌 주공아파트 거주민들의 이주는 지난여름부터 시작되었다. 한강 변 부촌 1번지라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비롯해 재건축 단지는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970년대 도시 계획의 본격화와 함께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40년, 50년 한 세대의 주기를 마치고 수명을 다한 아파트 단지들이 재건축을 앞두고 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 시기가 다가온 것뿐이다. 6천여 세대, 2만여 명의 거주민이 새로운 전셋집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면 반포주공 단지는 한순간에 폐허가 될 것이고, 그 초현실적인 풍경을 우리는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바라보는 것뿐 대안도 없다. 다만 기억할 수는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앞으로도 잃어버릴 것이 분명한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정재은 감독의 <아파트 생태계>는 그 시대의 상실을 묵묵히 바라보고 헤아리는 영화다.
<아파트 생태계>는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건축 시티: 홀>에 이어 건축을 둘러싼 사람과 공간을 다뤄온 정재은 감독의 세 번째 건축 다큐멘터리영화다. 한 명의 건축가와 하나의 건축물에서 서울의 아파트사라는 주제로, 범위가 넓어졌다. 정재은 감독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시리즈를 읽은 후, 손정목 선생이 직접 구술하는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이 작품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故 손정목 선생은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작고하셨고, 감독은 영화 말미에 “손정목 도시학자 영전에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크레딧을 올렸다) 영화의 메인 인터뷰이는 손정목 선생으로,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서울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그는 김현옥, 양택식 서울시장 시대를 거치며 사실상 당시의 서울 도시계획을 진행한 이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정부가 땅 투기를 하고 시장이 주도하고 시민이 참여했다. 이것은 희극이냐 비극이냐.” 아파트가 삶의 장소보다 재테크 수단이 된 작금의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다.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취임한 후, 서울은 그 어느 곳이든 ‘공사 중’ 팻말이 붙었다. 슬럼 지역을 현대화하고,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집이 필요했고 ‘단독 주택처럼 땅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주거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아파트를 지었다. 손정목 선생은 3핵 도시안(강북 구도심을 국가 중심, 여의도와 영등포는 산업 중심, 영동과 잠실은 금융업무 중심으로 개발)도 단 30분 만에 그려지고, 결정됐다고 회고한다. 한강과 여의도 개발이 시작되었고, 여의도와 강남 일대에 시민 아파트가 시범적으로 지어졌다. 당시에 한 평에 200원이었던 땅이 2천만 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여러 정치세력이 개입했겠지만 그렇지 않았고, 돌이켜보면 서울의 현재 모습은 놀라운 편이라 그는 말한다. 다큐멘터리는 손정목 선생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여의도 시범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둔촌주공아파트 등을 차례로 돌아본다. 그 시절을 일군 1세대 도시학자는 물론이고,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 세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기억이 그곳에 있다. 원래 다큐멘터리에서는 등장인물의 직업을 그래픽화하여 소개하지만, 정보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 서울의 수많은 이름 없는 아파트처럼, (계급장을 떼고 보면) 그저 한명 한명의 서울시민이 아닌가.
1970년대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따스하다. 단지, 오래된 것에 대한 낭만이 아니다. 초창기 도시계획에서는 시범단지를 통해 녹아내려 했던 공동 주택에 대한 나름의 이상 같은 것이 있었다. 조경을 공부하는 30대 직장인에게는 나무가 울창해서 좋은 곳이다. “토심이 1.5m예요. 그래서 2천 년대 이후에 지어진 아파트에 심는 나무들은 제 키만큼 자라지 못해요. 옛날 아파트는 다르죠.” 강제 철거를 당하고 시위를 통해 성취해낸 오래된 맨션아파트를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1985년에 목동에서 강제 철거를 당하고 여기 ‘목화 맨션’을 지어 줘서 왔어요.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재건축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자랑스러워하죠. 죽을 때까지 살기를 바라요.” 아파트 단지에서 지하철 등의 교통시설로 이동하는 공용 공간을 잘 직조하거나,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도록 단지를 배치하는 등 공동 주택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시절이다. 건축가나 도시학자 대신 대형 건설사에 설계 바통이 넘어간 후 그것들은 사라졌다.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불편한 이도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 3살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전업주부는 재테크에 성공한 시부모님 덕분에 (재건축을 앞두고 3배나 가격이 상승한) 신혼집을 마련했지만, 아파트 곳곳이 녹슨 것은 물론 내부 공간 역시 턱없이 작아 가구를 살 때 줄자로 재어 크기가 가장 작은 것을 사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아이가 자라기에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면은 좋지만, 재건축 플래카드가 붙으며 분위기가 흉흉해요. 사람들의 싸움이 잦아졌어요.” 카메라는 반포 주공아파트 조합원들이 모인 체육관도 비춘다. 경건한 애국가 완창이 끝나고 건설사 직원들이 조합원들을 설득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대사. “이렇게 되면 조합원님들께 약속드린 원 쁘라스 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원플러스원(1+1)은 두 배 면적의 아파트 1채가 아니라 현재 주택 면적과 같은 아파트 2채를 받는 방식. 한 채는 세를 주는 방식으로 이익을 크게 남길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은 ‘아파트 잔혹사’가 아닌, ‘아파트 생태계’이다.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할지라도, 개발의 역사를 섣불리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서울 한복판에 세워진 아파트 한 동 한 동은 지금까지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담아온 그릇이고, 그곳에선 각자의 삶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본디 가진 공공성의 의미를 회복한다면, <아파트 생태계>라는 말은 작동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애초에 아파트는 서민들에게 비싸지 않은 주거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아파트가 집이라는 개념보다 투자 수단이 된 것은 한국 재건축 시스템의 문제다. 소유자뿐 아니라 세입자도 살지만, 소유자 중심으로만 작동한다. 정책적으로 임대 주택을 함께 짓는 다면 재건축 시 35층이라는 층수 제한을 완화한다는 정책을 시 차원에서 제안해도 조합원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아파트를 둘러싼 여러 사람이(길고양이까지도) 더불어 살아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영화에도 등장한 조성룡 건축가는 GV에 참석해 이런 말을 남겼다. “아파트의 공공성이 무엇일까요. 공공(公共)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함께 이루는 것이에요. 나의 이익과 안전을 보호받지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배려도 있어야죠. 공공(公共)에는 공이 두 개나 들어가는데, 첫 번째 공(공적인)보다 두 번째 공(함께)이 더 중요해요.함께 가는 거죠.”

김만나